Here we see Steve Jobs at a keynote in 1983 showing for the first time
ever the famous "1984" ad by Ridley Scott to an exclusive audience. The
ad was shown on tv shortly after that only once during the 1984
Superbowl & never aired again & is considered to be one of the
greatest ads of all time.
It is 1958.
IBM passes up the chance to buy a young, fledgling company that has
invented a new technology called xerography. Two years later, Xerox is
born, and IBM has been kicking themselves ever since.
It is ten
years later, the late ’60s. Digital Equipment DEC and others invent the
minicomputer. IBM dismisses the minicomputer as too small to do serious
computing and, therefore, unimportant to their business. DEC grows to
become a multi-hundred-million dollar corporation before IBM finally
enters the minicomputer market.
It is now
ten years later, the late ‘70s. In 1977, Apple, a young fledgling
company on the West Coast, invents the Apple II, the first personal
computer as we know it today. IBM dismisses the personal computer as
too small to do serious computing and, unimportant to their business.
The early
‘80s-1981. Apple II has become the world’s most popular computer, and
Apple has grown to a $300 million company, becoming the fastest-growing
corporation in American business history. With over 50 compatitors
vying for a share, IBM enters the personal computer market in Nove
mber
of 1981 with the IBM PC.
1983. Apple
and IBM emerge as the industry’s strongest competitors, each selling
approximately $1 billion worth of personal computers in 1983.
Each all
investor greater than $50million for RND and another $50million for
Television Advertising in 1984 totalling almost one quater of 1 billion
dollor combined. The shakeout is in full swing. The first major firm
goes bankrupt, with others teetering on the brink. Total industry
losses for 83 out shadow even the combined profits of Apple and IBM for
personal computers.
It is now
1984. It appears IBM wants it all. Apple is perceived to be the only
hope to offer IBM a run for its money. Dealers, initially welcoming IBM
with open arms, now fear and IBM-dominated and controlled future. They
are increasingly indesperately turning back to Apple as the only force
that can ensure their future freedom.
IBM wants it
all and is aiming its guns on its last obstacle to industry control:
Apple. Will Big Blue dominate the entire computer industry, the entire
information age? Was George Orwell right about 1984?”
Big Brother:
Today, we celebrate the first glorious anniversary of the Information
Purification Directives. We have created, for the first time in all
history, a garden of pure ideology, where each worker may bloom, secure
from the pests purveying contradictory thoughts. Our Unification of
Thought is more powerful a weapon than any fleet or army on earth. We
are one people, with one will, one resolve, one cause. Our enemies
shall talk themselves to death and we will bury them with their own
confusion. We shall prevail!
Announcer: "On January 24th, Apple Computer will introduce Macintosh. And you'll see why 1984 won't be like "1984"."
꽤 바쁜 상황이긴 한데, 회사의 방침이라 해병대 캠프에서 구르다 올 예정이다. 군대식 훈련은 고등학교 교련 시간 이후 처음인가?? 첫 동문회 때 선배들 얼차려도 있었던가?
참가자들의 심신을 강화해 조직력을 강화한다는 훈훈한 의미를 지니고 있으니, 아무런 군소리 없이 다녀올 예정이다. (가기 전이니까, 절대로 안해!!)
얼마 전에 남의 블로그서 읽은 아래 내용이 상기되는 건 생리적인 현상일 뿐!! 엇쨋든, 바쁜 업무 제껴 두고 가는거니 수료 후 뭔가 교훈적인 걸 얻어 오면 좋겠다.
사소한 것에 목숨 걸지 마라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은 직설화법이다. 예컨대 안 되는 회사는 변화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은 있지만, 변화의 방향을 모르기 때문에 사소한 변화에 집착한다고 지적한다. 비용절감 운동을 하면서 이면지 사용에 목숨을 걸거나, ‘30분 일 더하기’ 운동을 하면서 출근시간을 앞당기거나, 실체가 불분명한 ‘좋은 직장 만들기’ 운동을 열심히 하는 게 대표적인 사례다. 이런 지적에 뜨끔할 기업이 적지 않을 듯하다.
널리 알려진 이야기로 잘 되는 회사는 회의가 적고, 안 되는 회사일수록 회의가 많다고 한다. 그러나 저자는 잘 되는 회사나 안 되는 회사나 회의는 많다고 말한다. 다만 차이점은 잘 되는 회사는 회의 후 결론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설혹 결론이 나지 않더라도 다음 회의는 어떤 주제로 진행돼야 한다는 것 정도는 반드시 결정한다. 이에 비해 안 되는 회사는 회의시간만 길 뿐 아무런 결론이 없다. 심지어 다음 회의에서 무엇을 해야 할지도 결정하지 않고 회의가 끝난다. 이쯤 되면 도대체 회의를 왜 하는지 아무도 모를 지경이다.
직원들의 정신교육에 각별히 공들이는 회사도 안 되는 회사의 전형이다. 시스템은 정비하지 않고 정신교육만 강조하면 업무능력이 뛰어난 사람은 불만을 품게 되고, 성실한 사람은 바쁘기만 하고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 상황에 빠진다. 그 결과 똑같은 실패를 반복하고서도 교훈을 얻지 못하고 실패를 거듭하게 된다.
10년(벌써?!) 전, 전공 수업 때 수도 없이 들었고 토론하던 주제이고 어떤 위치에서든 마케팅을 한다면 당연히 분석해야 할 키워드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 분석의 필요성은 인지하지만 수 년 간 실무를 하면서 왠만해서 깊숙한 분석까지 가지 않은 것이 사실.
오늘 우리 팀 사람들과 이야기하면서도 왠지 허공에 떠 도는 말들... 이건 아닌데 하면서도 나 스스로 그 핵심이라는 부분 도출해 거기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니 깊이 반성할 일이다.
과정과 분석을 중시하는 윗 상사와 결과와 직감을 중시하는 최고 경영자, 이 둘의 핵심역량을 발란스 좋게 흡수할 수 있으면 내 경쟁우위도 높아 지려나...
팀 회의 후 이래 저래 마음이 꿍~~한 하루였다.
마케팅과업으로서의 핵심역량관리
핵심역량의 의의 오늘날의 기업은 경쟁력을 향상시키지 않으면 시장에서 살아남기 힘든 강한 도전에 직면해 있다. 이러한 도전은 국내외적으로 심화된 경쟁압력, 경제의 글로벌화로 인한 경쟁자 수의 증대, 혁신 및 새로운 경영기법의 도입과 적응을 위한 노력경주, 가속화되는 기술변화 등에서 연유하고 있다. 이러한 도전은 모든 기업에게 해당된다고 하겠는데, 시장에서 지배적인 경쟁우위를 지니고 있는 기업마저도 그 지위를 상실할 위험이 증대되고 있기 때문이다. 기업의 경쟁력 향상에 대한 노력은 결국 특정 시장에서 경쟁적 우위를 지속적으로 지니기 위한 것이다. 이러한 경쟁우위는 단순히 경쟁기업에 비해 독특하거나 고객의 효용에 특별히 기여하기 때문에 우월성을 지니고 있는 제품의 특성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기업이 시장에서 경쟁업체에 비해 갖는 지속적인 우위성은 기업이 보유하고 있는 자원, 특히 핵심역량에 있다. 다시 말해 동일한 환경 하에서도 기업이 실현하는 성과가 달라지는데, 이것은 기업이 지니고 있는 자원과 능력의 차이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업성공의 원천은 바로 이러한 경영자원과 능력의 결합을 통해 이루어지는 기업의 핵심역량(core competence)인 것이다. 핵심역량이라는 용어는 90년대 이후 가장 많이 회자되는 단어 중의 하나로서 오늘날 기업경영에 있어서 하나의 중핵을 이루는 핵심어가 되고 있는 것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면서도 막상 이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학계나 실무계에서 의견이 엇갈리고 있어 정의에 혼란스러운 면도 없지 않다. 핵심역량이란 용어가 어떻게 구체적으로 정의되던 이 개념이 지니고 있는 공통적인 특징은 우선 이것이 기업의 외적 관점과 내적 관점, 즉 시장지향성과 자원지향성을 결합한 개념이라는 사실이다. 어느 기업이나 창립 시부터 어떤 형태로든 인적, 물적 자원을 보유하고 있으며, 자원의 구성은 주어진 여건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이 경쟁에서 기업간 및 실적의 차이를 가져오게 한다. 그러나 개별 기업이 지니고 있는 독특한 자원들이 실질적으로 경쟁우위를 달성하는데 기여하는지 여부는 이들 자원의 시장관련성에 달려있다. 기업은 독특한 지식을 지니고 있으나 이것이 판매시장에서 요구되지 않는 것일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마케팅측면에서 볼 때, 특유의 자원을 획득하거나 개발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경영층이 경영자원의 개발과정을 현재 및 미래의 시장욕구에 맞추어 추진해야 한다는 것이다. 독특하고 시장과 관련을 지닌 경영자원만이 경쟁우위를 달성하기 위한 기초가 된다. 따라서 자원지향성은 시장지향적인 사고에 반대되는 개념이기보다는 오히려 이를 보완하는 필수 불가결한 요건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핵심역량이란 시장에서 경쟁우위의 핵심이 되는 독특하고 시장관련적인 기업능력을 말한다고 하겠다.
마케팅관리자의 과업 이러한 경영자원과 시장의 관련성은 핵심역량과 관련하여 마케팅관리자에게 다양한 측면의 과업이 부여된다. 관리자는 고객의 옹호자로서 시장에 적합한 제품을 개발하도록 노력을 경주해야 한다. 이것은 그러나 그가 제품과 자원간의 연결부서에 관여하여 경영자원의 개발과정에도 영향을 미칠 때 가능하다. 이 뿐 아니라 마케팅관리자는 각 사업단위에서 이루어지는 제품생산에 투입되는 자원의 효율화를 위해 각 사업단위간 및 기능부서간에 조정, 통합을 할 수 있는 권한을 지녀야 하고, 시장과 직접적인 관련을 지니고 있지 않은 부서에서도 시장 내지 고객지향적 사고를 가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는 곧 마케팅관리자가 기업의 핵심역량의 개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이에 공헌해야 함을 의미한다 하겠다.
핵심역량의 결정요소 기업의 자원이 핵심역량이 되기 위해서는 전제조건인 VRIO 기준이 충족되어야 한다. 1) 가치(Value): 핵심역량은 특히 시장가치를 창출하는데 있다. 자원이 핵심역량이 되려면 이것이 무엇보다 현재 및 미래의 시장욕구를 더 잘 충족시키는데 기여한다는 것이 확실해야 한다. 그러므로 기업은 경영자원이 실질적으로 적합한 시장에 투입되고 있는지를 면밀히 검토해야 한다. 핵심역량을 위해 여기에 우선 맞는 시장을 개척해야 하고 그간 이용되지 않았던 잠재역량을 활성화해야 할 경우도 발생한다. 이것은 바로 시장선정에 대한 의사결정과 핵심역량의 관리가 서로 밀접히 연관되어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2) 희소성(Rareness): 다양한 자원의 조합으로서의 핵심역량은 드물 뿐 아니라 유일하다. 그러므로 핵심역량은 시장에서 쉽게 구입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핵심역량은 특정 기업에 종사하는 구성원의 지식과 생산요소의 결합으로 구성된다. 이러한 유의 자원 연결망은 그 독특성(uniqueness)과 복잡성(complexity) 때문에 근접하더라도 평가하기가 불가능하며 이것이 외부시장에서의 역량획득을 어렵게 한다. 이뿐 아니라 핵심역량의 소유기업도 자신의 경쟁우위 원천을 매각하는데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것은 다른 한편 자신의 경쟁능력이 유출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3) 불완전한 모방성(Imperfect imitability): 기업이 지니고 있는 경영자원은 이것을 경쟁자가 쉽게 모방할 수 없을 때 진정한 의미에서 기업의 핵심역량이 된다. 실제 핵심역량은 장기간의 지속적이고 의식적인 노력을 통해 축적된 것이고 외부인으로서는 이러한 역량이 어떻게 결합되어 있는지를 알 수 없기 때문에 경쟁기업이 이를 모방하거나 대체할 수 있는 처지가 되지 못한다. 예컨대 제품의 소형화(miniaturization)에 핵심역량을 지니고 있는 소니사의 경우 경쟁업체들은 결정적인 부면에서 소니사의 소형화 능력이 어디에 근거하는지를 알지 못한다. 더 나아가 어떤 기업이 소니사의 몇몇 종사원을 스카웃할 수 있다해도 이러한 능력을 모방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종업원 각자가 부분적인 지식만 가지고 있으며 일반적으로 자원개발의 장기적인 진행과정에서 부분적인 단계만을 경험하였기 때문이다. 4) 조직상의 특수성(Organizational specificity): 핵심역량의 네 번째 특징은 이러한 능력이 일반적으로 판매시장과 관련이 있기는 하지만 그 역량은 이것이 개발된 기업에 의해 가장 잘 발휘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특정 핵심역량은 해당 기업의 보유자원에 내재화되어 있어 이러한 자원에서 쉽게 분리될 수 없으며 분리되는 경우에도 그 효과가 반감되는 것을 감수해야만 한다. 한편 이러한 조직상의 특수성이 경영자원을 보유한 기업으로 하여금 자신의 노하우 일부를 경쟁자에게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낳게 한다. 또한 경쟁자가 상대기업이 지니고 있는 역량을 취하기보다는 이를 무력화시키는데 관심을 집중시킬 수 있다는 위험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위험은 핵심역량이 안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핵심역량의 확인 및 육성 핵심역량을 규명하는 절차는 근본적으로 다음과 같은 분석단계를 거쳐야 한다. 1단계: 경영자원의 검토 2단계: 잠재적 핵심역량의 확인 3단계: VRIO기준에 따른 검토 4단계: 육성가능성의 파악 5단계: 부족한 역량의 확정 6단계: 부족한 역량의 보완을 위한 전략 7단계: 시장선정 의사결정
경영자원의 검토단계에서는 특히 기업의 생산요소들이 어떠한 방법으로 구성되어 상호 작용하는지를 규명한다. 기업이 구체적으로 어떤 자원을 보유하고 있는지를 파악하는 것은 핵심역량을 확인할 수 있는 전제가 된다. 여기에서 주의할 점은 핵심역량을 생산요소나 제품 혹은 기술과 관련하여 정의하는 오류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정의의 대상은 항상 시장요구와 관련하여 파악되는 기업의 독특하고 탁월한 능력이어야 한다. 이러한 유의 역량이 실질적으로 핵심역량이 될 수 있는지는 위에서 언급한 VRIO기준에 의해 검토해 보아야 한다. 이러한 검토를 통해 경쟁우위라고 할 수 없는 기본역량을 핵심역량과 구분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이 기준의 개별조건에 충족하지 못할 때 이들은 기본역량에 해당된다. 그리고 이러한 역량이 핵심역량으로 육성될 가능성이 있는지도 검토해 보아야 한다. 일반적으로 많은 기업체들은 실질적으로 핵심역량을 갖고 있지 않거나 소수의 진정한 핵심역량을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기존의 역량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보다 이를 육성하는 일이 더 시급할 수 있다. 이는 육성가능성 분석을 전제로 한다. 이러한 육성가능성은 다음의 세 가지 방향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 1. 심화(deepening): 이미 활동하고 있는 시장에서 핵심역량의 활용 및 육성이 강화된다. 시장에서 그 역량을 지속적으로 활용함으로써 독특한 능력이 계속 발전된다. 역량활용의 이러한 심화는 도움이 되기는 하지만 이를 위해서는 지속적인 검토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능력의 발전과 시장여건의 변화로 인해 새로운 시장에 그 역량을 투입해야 할 기회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2. 확대(broadening): 핵심역량은 광범하게 활용된다. 또한 기존의 능력을 여타 사업부문에도 적용하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다. 많은 핵심역량들은 기업이 거의 모든 활동영역에서 필요로 할 정도로 범용화되어 있다. 더 흥미로운 사실은 기존의 핵심역량으로 새로운 시장을 개척해 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만일 기업이 지닌 능력으로 새로운 시장욕구에 부응할 수 있다면 이것은 새로운 시장에서의 성공을 위한 좋은 기반이 될 것이다. 이러한 경우에는 다각화전략이 주효할 수도 있는 것이다. 3. 이동(shifting): 기존의 핵심역량이 새로운 핵심역량을 개발하기 위해 활용된다. 이것은 분명히 가장 어려운 과업이기도 하다. 그러나 기업은 역량의 육성과정에서 경험을 쌓게되고 그래서 이러한 경험을 통해 그 능력을 다른 영역에 적용시킴으로써 새로운 핵심역량을 개발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세 가지 대안은 상호배제적인 것이 아니고 상호 보완적이다. 이러한 대안들을 어떻게 조합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할 지는 마케팅관리자가 검토해야 할 사항이다. 시장욕구와 관련하여 수행된 자원분석에 근거하여 기업은 목표시장에서 활동하는데 부족한 핵심역량이 무엇인지를 발견해야 한다. 이 다섯 번째 단계는 마케팅전략을 수립하기 위한 전초단계가 된다. 만일 기업에게 중요한 핵심역량이 결여되어 있고 이것이 단기적으로는 개발하기가 힘든다고 할 경우 시장철수문제가 제기된다. 이것을 피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자원 갭을 확인한 후 이러한 갭을 없애기 위한 방안을 강구하는 여섯 번째 단계를 실시해야 한다. 부족한 역량을 보충할 수 있는 방법으로는 여러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 부족한 핵심역량을 자체적으로 구축하는 것이다. 핵심역량의 개발은 일단 성공하면 기업 내에서의 파급효과는 대단히 크다. 문제는 새로운 핵심역량을 구축하는 데에는 대단히 많은 노력과 시간이 소모되나 그 결과는 미지수일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그리고 또 다른 문제는 기업 내에 이러한 역량을 구축할 수 있는 자원이 이미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미래시장을 위해 요구되는 능력이 부족한 경우 이것은 단기적으로 해결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단기적으로는 자체적인 역량개발이 대부분 실패로 끝난다. 두 번째 방법은 적합한 인수전략(acquisition strategy)을 고려하는 것이다. 인수합병은 기업이 부족한 핵심역량을 신속히 확보할 수 있는 방법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우선 막대한 자금과 위험이 따른다. 또한 부족한 역량을 보충해 줄 수 있는 역량을 지닌 기업을 발견하여 인수하는 것이 쉽지 않을 뿐 아니라 설혹 이러한 기업을 인수했을 경우에도 외부 능력과의 통합에 따른 적응문제와 효과상실문제가 제기된다. 또 다른 위험은 자원을 재구성해야 한다는데 있다. 이러한 재구성은 특히 상호관련성에 대한 충분한 지식의 결여로 인해 일반적으로 또 다른 효과상실과 역량약화를 가져온다. 따라서 인수합병을 통한 외부능력 취득은 장기적인 전략의 일환으로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이라 하겠다. 자원의 부족을 보충할 수 있는 또 다른 방법은 전략적 제휴이다. 여기에서는 기업간에 주요 자원의 의도적인 결합을 통해 결여된 역량을 보충하는 것이다. 이러한 전략의 성공여부는 상당부분 파트너가 누구인가에 달려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제휴는 오늘날 매력적인 시장에 신속히 진입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 되고 있다. 부족한 핵심역량의 보충하기 위해 무엇이 가장 효과적이고 바람직한 전략인지는 일반화해 말할 수 없다. 이는 상황과 여건 및 미래전망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마지막 단계로 기업은 어느 시장을 미래의 목표시장으로 할 지에 대한 의사결정을 내려야 한다. Hamel과 Prahalad는 이러한 의사결정을 지속적으로 재고해 보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기업의 역량은 물론 시장상황도 계속해서 변하기 때문이다. 이는 새로운 기회도 제공하지만 기존의 희망을 무위로 만들기도 한다. 그러므로 시장선정에 대한 의사결정은 자원 지향적인 관점에서보다는 마케팅관점에서 이루어져야할 것이다.
결어 기업의 핵심역량관리에 대한 과업은 마케팅을 포함시키지 않고서는 해결될 수 없다. 경쟁우위가 결국 독특하고 경쟁업체 비해 탁월하며 시장으로부터 요구되는 능력에 바탕을 두고있어야 한다면 기업의 핵심역량은 마케팅영역에서 추구되어야 한다. 이것은 곧 마케팅이 단순한 판매영역에만 한정되지 않고 기업의 전사적 과업에 속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오늘날 마케팅관리자에게 부과되는 책임은 대단히 크다. 마케팅관리자의 과업은 무엇보다 기업의 모든 분야에 고객 내지 시장지향적인 사고가 착근할 수 있게 하는데 있다. 제조업의 경우 핵심역량은 기술과 관련된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므로 마케팅관리자에게는 자신의 능력향상에 대한 노력도 필요하지만 특히 기술에 대한 이해와 여타 경영기능에 대한 지식이 요구된다. 핵심역량관리는 특히 미래 시장 지향적이어야 한다. 전통적인 전략계획은 일차적으로 주어진 시장여건에 적응하는데 주력하는 것이라면 핵심역량 사고를 지닌 기업은 시장규칙을 스스로 설정하는데 노력을 경주한다. 이러한 기업은 기존의 고객효용을 향상시킬 뿐 아니라 미래의 고객효용을 예상하고 이를 창출함으로써 경쟁에서 탁월한 위치를 점할 수 있고 동시에 지속적인 경쟁우위를 보유할 수 있게 될 것이다.
Hoover - 후버
후버는 브랜드 자체가 제품을 나타내는 용어와 동의어처럼 쓰이는 드문 사례로써 옥스퍼드 사전에 수록되는 영광을 누리고 있다(사전에서 "Hoover"를 찾아보면 진공청소기 대신 자주 쓰이는 용어로서, "to hoover"는 "진공 청소기로 청소하다"로 풀이되어 있다). 그 동안 후버는 몇 세대에 걸쳐 미국과 전세계 가정에 진공청소기를 판매해왔다. 브랜드 인지도 면에서 후버는 단연 수위를 차지하는데, 2위와는 4배 정도의 격차를 나타낸다.
윌리엄 H.후버(William H.Hoover)는 1849년 펜실베니아 랭캐스터 타운티에서 태어났다. 1875년 후버는 오하이오 노스캔턴에 있는 존린드라는 피혁 공장(이 공장은 나중에 W.H 후보회사로 이름이 바뀌었다)을 사들인 뒤 그 곳으로 가족과 함께 이주했다. 1907년, 당시 아내의 사촌인 머레이 스팽글러(Murray Spangler)는 캔턴의 어느 백화점 야근 관리인으로 근무하고 있었는데, 천식환자였던 그의 가장 큰 고민은 바닥을 청소할 때 생기는 먼지였다. 그래서 그는 함석통과 팬, 굴대받이, 손잡이 등으로 40파운드나 나가는 조잡한 도구를 만들었는데, 어쨌든 이 도구는 먼지를 막아주기는 했다. 진공청소기가 탄생되는 순간이었다. 스팽글러는 후버에게 이 장치를 만들어 판매할 수 있도록 지원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 장치를 실제로 사용해본 아내가 상당히 만족해 하자 윌리엄 후버는 1908년에 스팽글러로부터 청소기의 특허권을 사들였다. 뒤이어 후버 흡입청소기 회사를 설립했고, 스팽글러를 공장 감독으로 임명하여 생산과정을 책임지게 했다. 첫 해에는 여섯명의 직공이 350대의 "흡입청소기"를 만들어 팔았다. 후버의 명성이 미국전역에 알려졌고, 이내 해외로 퍼져 나갔다. 후버는 1932년 2월25일 숨지게 되었으나 후버브랜드는 관련부문에서 가장 높은 인지도를 누리게 되었다. 현재 후버의 모기업인 메이태그사는 1893년 F.L 메이태그(F.L. Maytag)가 설립한 회사로서 아이오와 뉴턴에서 농기계를 생산했다. 1907년 그는 농기계 수요가 거의 없는 계절에는 목제 세탁기를 만들었다. 이 세탁기가 인기를 끌자 메이태그는 곧 농기계 사업을 포기하고 세탁기 사업에만 전념하게 되었다. 오늘날 후버 외에도 이 회사는 메이태그 론드리와 젠-에어를 포함한 유수의 브랜드를 다수 확보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메이태그는 주요 가전 산업 부문내 총점유율 및 규모면에서 3위를 차지하고 있지만 프리미엄 부문에서는 그보다 상위에 랭크될 수 있다. 그러나 메이태그는 영국의 진공청소기 메이커인 다이슨(Dyson)의 도전에 대응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래서 후버는 다이슨의 사이클론 시스템을 채택한 독자적인 제품을 시장에 내놓았다. 그리고 윈드 터널 디자인의 특허도 따냈다.
Ikea - 이케아
이케아는 이 시대의 가장 뛰어난 소매브랜드중 하나다. 스웨덴의 가구회사인 이케아는 가격에 민감한 전세계 젊은 주부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이들 주부에게 "이케아"하면 적당한 가격에 구매할 수 있는 멋진 디자인의 가구를 연상한다.
이케아는 스웨덴 농촌지역인 스몰랜드에서 어렵게 출발했다. 처음에는 우편판매를 하는 소규모업체였으나, 지금은 연간 매출 58억 달러의 대규모 가구회사로 성장했다. 이케아 브랜드는 창업자인 잉그바르 캄프라드(Ingvar Kamprad)의 경영 이념에 바탕을 두고 있는데, 브랜드명의 앞쪽 두글자는 그의 이니셜을 취한 것이었다. 이케아는 28개 국에 140여개의 판매점을 운영하고 있으며, 종업원 수는 약 3만 5,000명이다. "이케아"는 체계를 갖춘 몇가지 가치를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 이 같은 가치체계에 따라 어떤 기업도 흉내낼 수 없는 고객과의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단순한 디자인에 흰 래커칠을 한, "빌리"라는 명칭의 책장은 20년동안 꾸준히 팔리고 있다. 이처럼 단순한 디자인으로도 꾸준한 수익을 올리고 있다는 것은 곧, 이케아가 고객의 마음을 잘 꿰뚫어보고 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1997년 이케아는 어린이 가구 생산과 장난감 사업을 새로 시작했다. 또한 판매점 확충을 위한 투자를 계속했다. 2000년까지 폴란드에 10개 판매점을 열고 불가리아와 루마니아, 러시아에도 판매점을 오픈할 예정이다. 그 다음에는 아시아로의 진출을 목표로 삼고 있다.
중국 상하이에 지금까지 1,000만 달러를 투자한데 이어 타이완과 홍콩에도 소매 및 유통망 조직에 1억 3,000만 달러를 투입했다. 그러나 현재 이케아의 가장 큰 문제는 후계 문제다. 70대인 캄프라드는 공식적인 활동을 사장인 모부르크에게 넘겨주었지만 여전히 적극적인 활동을 멈추지 않고 있다. 이케아가 캄프라드의 독특한 역할과 리더십 없이도 계속 성공을 거둘 수 있을지는 두고 봐야 할 것이다.
Reprodux - 리프러 덕스
영국 튜더왕조 시대의 가구를 재현한 품격의 가구 명가 리프러덕스는 700년 동안 가업으로 내려오던 가구업을 Beven Funnell이 1945년에 대규모 가구 회사로 설립하여 본격적으로 세계 시장에 진출하여 영국에서는 물론 유럽시장에서 가장 뛰어난 가구로 호평을 받고 있다. 리프러덕스는 가구로서는 최초로 1967년, 1970년 산업 부문에서 영국 여왕상(The Queens Award to Industry)을 받은 바 있다. 리프러덕스라는 상표의 의미그 자체가 영국 전통이 고풍스러운 가구를 재현한다는 뜻으로 15세기 말부터 17세기 초까지 영국 튜더 왕조시대의 가구 스타일과 공법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다. 영국에서는 가구를 앤틱(Antigue), 리프러덕션(Reproduction), 모던(Morden) 등 세 분야로 구분하는데, 리프러덕스는 리프러덕션(Reproduction) 분야에서 가장 대표적인 브랜드로 손꼽히고 있다. 리프러덕스는 주목, 마호가니, 참나무, 체리목 등 원목의 특성을 그대로 살린 전통적인 방식의 공정으로 나무의 무늬결을 그대로 살리고 자연스런 색감이 나도록 손으로 직접 칠하는 등 모든 공정이 수작업으로 진행된다. 특히 얇은 무늬목이 아니라 2㎜ 이상의 원목을 사용하여 견고하고 반영구적이다. 전문 바이어가 세계 각지의 최상의 목재를 구입하는 데 마호가니 목재 및 합판 배니어는 주로 중남미산을 사용하고, 오크는 북아프리카산, 주목은 북유럽산을 사용한다. 자르고 조각하는 모든 공정이 전통적인 방법으로 수공처리되는데 장식장의 경우 유리를 조각조각 자르면서 창틀에 연결하고 가죽을 붙이는 경우에도 꽃문양의 로울러를 어깨로 눌러 음각하여 표명에 부친다. 나무의 무늬결은 대칭되도록 자르고 표면 처리를 하고 고풍스러운 느낌을 주도록 나무표면에 흠집을 낸 후 자연스런 색감이 나도록 손으로 직접 칠을 한다. 락카 역시 스프레이로 뿌리지 않고 손으로 직접 칠할 정도다. 리프러덕스 소파는 영국 전통 스타일인 버튼(Buttened)방식으로 영국에서 가장 좋은 가죽제품인 Pegasus사의 최상의 소가죽만을 사용해 최상의 품질과 품격이 느껴지는 명품이다
Noritake - 노리다케
전근대적인 봉건사회인 일본이 세계로 문호를 개방하던 19세기 동안 가장 중요한 일본 상업의 대표적인 인물인 이찌자몬 모리무라(Ichizaemon Morimura) 는 일본 상품의 미국 수출에 대한 잠재력을 깨닫게 되었다. 1876년 그는 미국으로 도자기와 다른 기프트 상품을 운송하는 Morimura-kumi 사를 설립하고, 뉴욕의 도소매 상점을 통해 판매하였다. 모리무라는 곧 미국 시장이 일본산 도자기 식기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어 있음을 깨닫고 그의 제품이 최상급의 품질임을 확신시키기 위해 그 자신의 공장을 설립함으로써 생산품을 관리하기로 결심했다. 결국 그는 1904년 1월 1일 나고야 근방의 노리다께라는 마을에 Toki Gomei Kaisha 라는 이름의 새로운 회사를 설립하게 되었다. 그 이후 노리다케는 점차 세계적인 최고급 식기류 생산업체로서의 명성을 쌓아갔다. 초창기부터 도자기의 이름은 공장이 위치한 고장인 노리다께로 불리워져 마침내 1981년 Noritake Company Limited 로 공식적으로 회사명을 변경할 정도로 유명해졌다. 노리다께는 오랜 역사와 전통을 통해 도자기 제조기술을 증진시키는 공정과 기법을 발전시켜 왔다. 오늘날 노리다께의 다양한 기법들은 각 사업부문으로 분리되어 시장에 내놓아지고 있고, 철저한 연구 개발로 새로운 시장과 사업을 지속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실제로 모리무라의 개척자적 정신은 전세계에 걸쳐 수백만의 제품과 경력에 영향을 미치고 있고, 노리다께라는 작은 마을로부터 성장해 온 완벽함을 위한 헌신적인 수행속과 창조적인 아이디어속에 계속 살아 숨쉬고 있다.
Royal Copenhagen - 로얄 코펜하겐
로얄 코펜하겐은 왕실에서 사용되는 도자기의 제작과 친분이 있는 타국 왕실에 대한 선물용 도자기로 제조되었다. 특히 줄리안 마리 여왕의 지원을 받게 되고, 1777년에서 1779년에 걸쳐서는 왕실과 궁정의 증답품으로 제작되기도 했다. 이들의 대부분은 자색이나 철분으로낸 적색 등 여러가지 유약으로 장식되었으며, 수취인의 머리글자 등을 금으로 입힌 소품으로 몇개는 현존하고 있다. 로얄 코펜하겐 도자기는 초벌구이를 마친 도자기 위에 그림을 그리고 유약을 발라 고온으로 재벌구이하는 언더 글래이즈 기법의 도기를 만들어 당시 19세기 유럽 상류 계급에서 애용되며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자연을 모티브로 하는 아름다운 그림들을 페인터들의 수작업에 의해 하나하나 만들어진 도자기는 수공예의 극치라고 할 수 있으며, 오랜 전통과 기술에서 배양된 장인 정신은 오늘날도 로얄 코펜하겐 도자기를 통해 만날 수 있다.
로얄 코펜하켄은 훌륭하고 독특한 "플로라 다니카(Flora Danica)"와 "블루 플루티드(Blue Fluted)"의 대표적인 시리즈를 제작하였다. 뛰어난 장인에 의한 전통적인 품질로 덴마크는 물론 세계 최고의 명성을 얻게 되었다. 페인터들에게는 특별한 재능과 인내심을 요구하기 때문에 많은 도자기 회사들이 핸드 페인팅에 의한 도자기 생산을 포기하였지만 로얄 코펜하겐은 오늘날까지 핸드 페인팅을 고수하고 있다. 로얄 코펜하겐 도자기는 거의 모두가 손으로 그려졌으며 각 작품의 뒷면에는 트레이드 마크, 상품번호, 그림을 담당한 페인터의 자신과 긍지가 숨쉬고 있는 각 페인터의 사인이 그려져 있다. 소재, 소성온도의 차이에 따라 자기, 파이앙스 도자기(도기), 스톤웨어 등으로 나누어지는데, 자기에 그림을 그리는 것은 수채화처럼 맑은 블루의 그림으로 대표되는 '언더 글레이즈 기법'과 다채로운 색으로 화려한 '오버 글레이즈 기법'이 있다.언더 글레이즈는 로얄 코펜하켄에서도 가장 대중적인 시리즈인 블루 플루티드, 블루 플라워 등 테이블 웨어, 안데르센 동화를 모티브로 한 동물, 인물 등의 인형으로 대표되며, 후자에는 제작기간이 2년이 되는 프롤라 다니카의 테이블 웨어 등이 있다. 로얄 코펜하겐의 파이앙스 도자기 제품으로는 트랭큐바의 테이블 웨어가 대표적이다.
Royal Dulton - 로얄 덜튼
세기 전통을 지닌 영국 최대의 도자기 그룹 존 덜튼이 1815년에 창립한 로얄 덜튼은 그동안 영국 왕실에서 애용되면서 영국의 전통과 품위의 대명사로 일컬어져 온 차이나 웨어의 명품이다. 커피 세트와 디너용 테이블 웨어가 주종을 이루는데, 특히 디너 세트는 무늬가 화려하지 않고 은은한 색조를 띠어 세계적으로 호평을 받고 있다.
현재 20여 개의 도자기 공장을 갖고 있는 로얄 덜튼 그룹은 테이블웨어 중심의 '민튼', 동물 형상의 도자기 '존 베스윅', 그리고 현대적 작품 기법으로 유명한 '패러곤'과 '로얄 알버트', '로얄 크라운 더비'를 생산하고 있다. 여러 기법의 개발을 통해 견고하고 밀도가 높으며 뛰어난 투광성과 유백색이 찬란한 본차이나를 선보인 로얄 덜튼은 1877년 요업 발전의 공로를 인정받아 빅토리아 여왕으로부터 요업계 최초로 '기사'작위를 받았으며, 1901년에는 '황실(Royal)을 회사명에 사용할 수 있는 허가를 받기도 했다. 제품이 장중하면서도 우아한 격조를 나타내 세계 각국의 왕실과 대사관에서 널리 애용하는 도자기의 명품이다.
Wedgwood - 웨지우드
마스터의 전통과 자부심으로 만든 차이나웨어의 걸작이자 영국도자기의 대명사 웨지우드(Wedgwood). 18세기 중반부터 2백여년동안 유럽 각국은 물론 세계 각국의 호사가들의 구미를 당겨온 최고급 도자기의 동의어, 웨지우드의 역사는 영국 도자기의 아버지라 부리는 조사이어 웨지우드라는 천재적인 도예공의 일생과 궤를 같이 한다. 천재적인 도예가 조사이어 웨지우드에 의해 1759년 창립된 웨지우드는 가장 영국적인 품위가 깃든 품격있는 디자인과 장인정신 그리고 최상의 품질로 세계시장에서 230년간 차이나웨어의 선도자로서 그 명성을 지켜왔다. 오늘날 웨지우드는 13개 공장에서 약 7천명의 기술자들이 영국 전체 도자기 생산량의 1/4을 생산하고 있으며, 영국 왕실을 위한 최고급 제품에서부터 일반 서민을 위한 범용 제품까지 다양한 제품을 생산하고 있다. 여왕의 자기(Potter to Her Majesty)라고 불리워지는 웨지우드 화인 본차이나 제품은 1812년 최초로 생산 개시된 이래 웨지우드의 주력 품목으로서 오늘날의 웨지우드 명성을 이루게 한 상품이다. 최근에는 차이나웨어에서 이룩한 명성과 기술을 통해 각종 도자제 기프트웨어와 액세서리 등으로 품목을 다양화하여 전세계 소비자들로부터 크게 호응을 얻고 있다. 웨지우드 본차이나의 특징은 크게 세가지다. 첫째는 놀라울 정도의 견고함이다. 원료의 50% 이상을 젖소의 뼈를 소성한 특수 분말을 사용하기 때문에 일반 클레이만 사용한 제품과는 달리 웬만한 외부의 충격에도 쉽게 깨지지 않는 초경성과 내마모성으로 인해 대를 물려 사용이 가능한 제품이다. 둘째는 은은하고 신비한 빛이 감도는 듯한 아름다운 백색의 투광성이다. 차이나 스톤을 갈아 반죽한 점토를 재료로 초벌구이를 한 다음 특수처리를 통해 유약을 바르지 않고서도 깊고 그윽한 상아빛의 신비한 색조가 우러나는 차이나웨어는 웨지우드의 전통이자 신화로 인정받고 있다. 셋째는 정교함이다. 초벌구이 후 유약처리가 완료된 이후 일일이 장인의 손에 의한 수공작업으로 최고의 장인들에 의해 창조된 아름답고 섬세한 문양과 일면 화려하면서도 세련미가 넘치는 우아한 장식들은 영국 상류사회의 멋과 기품을 풍기며 정교함을 자랑하는 웨지우드의 스페셜 콜렉션 웨어인 자스퍼(Jasper Ware)와 함께 백년을 두어도 변치않는 웨지우드 품질의 대명사이다.
廣州窯 - 광주요 - Kwang JuYo
광주요는 1963년 광호(廣湖) 조소수(趙小守) 선생이 전통도자문화의 재흥을 위해 조선시대 광조관요의 기술과 정신을 잇기 위해 경기도 이천에 광주요 설립을 계기로 전통문화의 생활화에 노력하고 있다. 초기 광주요는 청자, 분청, 백자 등 전통도자기의 색을 재현하여 전통 도자기의 생활화의 기반을 마련하고, 다도 기구를 중심으로 도자기가 생활 속에 자리 잡을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하였다. 1988년 2월 조태권(趙太權) 사장이 취임하면서 전통도자기 산업화의 기틀을 마련한 광주요는 생활식기를 양산하면서 도자문화의 생활화를 실현하기 위해 나아가고 있는데 이를 위해 1996년 재단법인 광주요도자문화연구소를 설립해 깊이있는 연구를 토대로 전통문화의 생활화에 노력하고 있다. 광주요 도자기는 천연물질로만 색상을 내 인체에 무해하고 색상이 자연스러우며, 전통 도자기의 멋을 계승해 우리의 음식과 식생활에 잘 어울린다. 또한 광주요 도자기는 손으로 만들어져 제품 하나하나가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광주요는 단순히 그릇의 의미를 넘어서 우리의 전통을 같이 만들어 간다는 자부심과 함께 손으로 조각된 섬세하고 깔끔한 제품으로 고급스러운 이미지의 추구를 통해 생활을 풍요롭게 만들어 준다.
CocaCola - 코카콜라
1886년 5월 조지아주 애틀란타에서 존 스타이스 펨버튼(John Styth Pemberton)이라는 약학자가 두뇌강장제라는 것을 내놓았다. 좀 펨버튼의 이 강장제 속에는 남미산 나무의 잎새와 서부 아프리카산 씨앗, 캐러멜과 인산, 그 밖에 오늘날까지 철저한 비밀에 싸여있는 일곱가지 "천연풍미"의 결합물이 들어있었다. 펨버튼 밑에서 장부를 정리하던 프랭크로빈슨(Frank Robinson)은 이 강장제에 "코카콜라"라는 이름을 붙였다. 로빈슨은 또 이 명칭을 장식문자로 비스듬하게 표기했다. (한편 1894년에는 노스캐롤라이나에서 케일럽브래덤(Caleb Bradham)이 소화불량에 도움이 되는 드링크를 개발해 판매하기 시작했다. 이 드링크에는 펩신제가 들어있었는데, 나중에 펩시콜라로 발전했다.)
존 펨버튼은 대중매체의 위력을 잘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항상 광고에 열을 올렸다. 애틀란타 저널에 실린 코카콜라의 첫 광고는 이렇게 호언장담했다. "코카콜라, 맛있고 원기를 북돋우며 기분을 상쾌하게 만든다! 펑 소리를 내는 소다수 용기에 든 이 새로운 드링크 속에는 신기한 코카식물과 그 유명한 콜라너츠의 특성이 그대로 담겨있다."
현재 하루 평균 9억개(병) 이상이 팔릴만큼 코카콜라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브랜드가 되었다. 코카콜라는 리비아, 이란, 쿠바(맛때문이 아니라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판매되지 못하고 있다)등을 제외한 전세계 거의 모든 나라에서 판매되고 있다.
펨버튼은 1888년 사망하기 직전에 아들과 함께 코카콜라 소유권을 아사캔들러(Asa Candler, 1851∼1929)에게 팔았다. 캔들러 역시 광고에 대단한 열성을 보였다. 코카콜라는 광고를 통해 고객을 끌어모으면서 용기자체에도 여러 가지 변화를 주었다. 특히 곡선미를 강조한 매끈한 모습은 20세기의 가장 뛰어난 이미지 중의 하나가 되었다. 이 병은 본래 1915년에 열린 디자인 경진대회의 산물로서, 당시 루트글래스(Root Glass)가 출품하여 우승했던 작품이다. 당시 코카콜라 사장이었던 캔들러는 "우리에겐 어둠속에서 손으로 만져만 보고도 코카콜라임을 알아볼만한 병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 병은 브랜드의 차별성을 드러내주면서 브랜드의 정체성을 한층 더 강화시켰다. 제2차대전은 미국사회의 중심부에 코카콜라의 입지를 확고하게 만들어주었다. 타임지는 코카콜라가 "평화적인 수단으로 전세계를 거의 제패한 점"을 축하했다. 대전 이후 코크는 사업영역을 계속 확대시켜 나갔다. 콜라이외에도 새로운 음료들이 추가되었는데 그 중에는 환타와 스프라이트, TAB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 중 어느것도 코카콜라만큼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1970년대에 코카콜라는 고이제타를 경영책임자로 맞아들였고, 그는 다이어트 코크를 내 놓아 큰 성공을 거두기도 했다. 그러나 코카콜라는 그 어느때 보다도 모험적인 브랜드 확장을 시도하는 쪽으로 나아가고 있다. 이 회사는 1980년대에 의류쪽으로 손을 뻗쳤지만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당시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토미힐피거(Tommy Hilfiger)를 인수했던 것이다. 아무리 유력한 브랜드라 할지라도 브랜드의 확장이 엉뚱한 방향으로 이루어질 경우 무리가 생길 수 있는 법이다.
Nescafe - 네스카페
9세기경 페르시아인들은 카와(Qahwa)라는 음료를 즐겼다. 루이 14세도 이 음료와 비슷한 것을 맛보았는데,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오늘날 커피는 전세계 수많은 사람들이 즐기는 대표적인 기호식품이다. 이러한 커피시장의 주종은 분말커피인데, 이 부문에서 전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브랜드라면 네스카페이다. 현재 네스카페 커피의 소비량을 초 단위로 계산하면 3,000컵 정도다.
네스카페를 개발한 회사는 거대기업 네슬(Nestle)이었다. 전세계 모두 489개의 공장을 운용하는 이 회사는 100여개국에서 수 많은 브랜드의 제품을 판매하고 있다.
네슬사의 연원은 1867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스위스 화학자이자 발명가이며 상인이었던 앙리 네슬(Henri Nestle)은 영양분이 풍부한 유아식을 개발했다. 이 제품에 파린 락테 네슬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네슬은 자신의 사업에 활용할 로고도 만들어냈다. 자신의 성(姓)중 앞부분의 "nest"가 모성과 안온함을 연상시킨다는 뜻에서 그대로 활용되었다. 이런 단순한 발상은 기업왕국으로의 눈부신 성장을 가져왔다.
1874년 쥘르 모네라(Jules Monnerat)라는 사람이 네슬로부터 회사를 매입해 연유사업에 주력하게 되었다. 1898년 네슬은 노르웨이의 연유회사를 인수했고 얼마되지 않아 미국, 영국, 독일, 스페인에도 공장을 세웠다. 나중에는 오랜 경쟁업체인 앵글로-스위스 연유회사와 합병했고, 다시 다른 회사와 두 번째 합병을 했다. 1907년에는 오스트레일리아에 공장을 세워 생산에 들어갔고, 싱가포르, 홍콩, 인도에는 창고를 지어 운용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알리멘타나와 합병함에 따라 조미료와 수프사업이 네슬왕국에 들어서게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후 이 회사는 식품산업의 거대기업으로의 확고한 기반을 다졌다. 1950년부터 1959년까지 인스턴트 커피 판매량은 세배로 늘어났고, 1960년부터 1974년까지는 네배로 증가했다. 냉동건조같은 혁신적인 방식이 사업확장에 도움이 되어 1966년에는 테이스터스 초이스(Taster's Choice)라는 인스턴트 커피 브랜드가 등장했다.
이후에도 일련의 인수·합병은 계속되었다. 네슬은 크로스&블랙웰(Crosse&Blackwell), 핀더스(Findus), 리비스(Libby's), 스토우퍼즈(Stouffer's)를 인수했다. 1974년에는 프랑스 화장품 그룹인 로레알(L'oreal)의 대주주가 되기도 했다.
그밖에도 1979년에 챔버시(Chambourcy), 1985년에 30억달러를 들여 카네이션(Carnation)을, 1988년에 로운트리 매킨토시(Rowntree Mackintosh)와 뷔토니 페루지나(Buitoni Perugina), 1992년에 페리어(Perrier), 1998년에 스필러즈(Spillers)를 각각 사들였다.
이에 따라 네슬은 22만 5,000명의 종업원을 거느린 세계 최대의 식품회사로 성장했다. 전세계에서 8,500개 제품을 판매하는 네슬의 연간 매출은 500억 달러를 상회한다.
Starbucks - 스타벅스
1971년 제럴드 볼드윈(Gerald Baldwin)과 고든보우커(Gordon Bowker), 지브시글(Zev Siegl)은 시애틀의 파이크 플레이스 시장에서 고급커피 판매점을 열었다. 이들은 이 사업을 위해 1만달러를 갹출했다. 그리고 여기에 스타벅스라는 상호를 붙였다. (이들은 스타벅스의 첫두글자인 "st"의 발음이 사람의 마음을 끌어당겨 오랫동안 기억에 남게 한다고 믿었다).
"커피숍"이 아닌, 커피제품을 판매하는 이들의 커피점은 1년도 채 되지 않아 수익을 내기 시작했다. 성장을 거듭해온 스타벅스는 1982년 하워드 슐츠(Howard Schultz)를 끌어들여 마케팅을 맡겼다.
1983년 스타벅스는 피츠(Peets)를 인수했는데, 나중에 공동설립자인 제럴드 볼드윈이 피츠를 떠맡기 위해 스타벅스를 떠나기도 했다. 뒤이어 스타벅스에 혁신적인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1987년 하워드 슐츠가 400만달러를 들여 스타벅스 경영진을 모두 퇴진시켰던 것이다. 그후 슐츠는 현재까지 스타벅스의 회장겸 CEO로 일하고 있다.
그는 "스타벅스는 유행이 아니라 생활방식이다"라고 주장하면서 브랜드를 알리는데 별다른 광고를 하지 않았다. 대신 판촉에 도움이 될 수 있는 다양한 제휴망을 구축하는데 힘을 쏟았다. 예를 들어 반스&노블, 유나이티드 항공등과 제휴관계를 맺는 식이었다. 스타벅스는 다양한 파생제품을 개발하는데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가령 스타벅스 아이스크림을, 펩시와 프라푸치노를, 그리고 커피를 약간 넣은 맥주를 개발하는 식이었다.
슐츠는 종업원 중심적 경영관리 방식을 개발하기도 했다. 그는 이와 관련해 이렇게 밝히고 있다. "그동안 우리는, 우리 브랜드의 가장 중요한 요소가 종업원이라는 점을 강조해왔다. 불가사의한 힘을 이끌어내는 것도 사람이고 경험을 창출하는 것도 사람이다." 그는 이런 인식에 걸맞게 자신의 자서전 제목을 『마음을 쏟아붓다 Pour Your Heart Into It』로 정했다.
스타벅스는 1992년에 기업을 공개했다. 공개한지 5개월만에 주식의 시세는 두 배로 뛰었다. 이제 이 회사의 인어로고는 어디에서나 볼 수 있다. 스타벅스의 미국내 커피 판매점은 1,600개소에 달하고 한해 매출은 13억 달러에 이른다. 또한 1998년 런던에 커피체인점을 오픈한데 이어 2003년까지 유럽에 500개의 판매점을 개점할 계획이다. 도쿄에도 판매점이 개점된 뒤 얼마 안돼 수백 개로 늘어났다.
Barbie - 바비
바비하면 가장 큰 성공을 거든 장난감으로 꼽히는데, 2000년으로 등장한지 41년째가 된다. 바비는 메이커인 마텔의 설립자중 한 사람인 엘리엇 핸들러(Elliot Handler)의 부인 루스 핸들러(Ruth Handler)의 아이디어였다. 핸들러 부인은 딸이 종이인형을 가지고 노는 것을 보면서 좀 더 오랫동안 가지고 놀 수 있는 실감나는 인형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바비는 어디서나 일정한 모습을 갖춘 표준화된 제품이지만 성공의 일부요인은 다양한 의상에서 찾을 수 있다. 바비에 입힐 새로운 의상은 해마다 무려 100개 이상 추가된다. 바비의 웹사이트는 "바비는 성공한 여성실업인이자 록밴드의 멤버이며 여자 월드컵 축구선수이기도 하다"고 전해준다. 그리고 켄이란 애인도 있는데, 그녀에게 딱 알맞는 상대다. 1961년에 등장한 켄은 그녀뒤에서 다양한 삶을 성공적으로 이끌고 있는 바비를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는 듯하다. 또 바비의 친구 밋지도 있는데, 1963년에 첫 모습을 드러냈다가 사라진 후 1988년에 불쑥 나타나 많은 사람을 놀라게 했다.
바비메이커는 바비가 다양한 커리어를 추구하고 있는 점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이와 관련해 마텔은 이런 자랑을 늘어놓았다. "바비는 자신을 사랑하는 모든이에게 자부심과 매력, 모험심을 불어넣을 수 있는 독특한 힘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바비는 1994년과 1986년, 그리고 1965년에 각각 우주비행사란 역할 모델을 여성들에게 보여주었는데, 1965년의 우주비행사 모습은 첫 여성 우주비행사의 우주 항해에 비해 무려 20년이나 앞선 것이다. 그리고 1963년에는 대학졸업생의 모습으로, 1973년에는 외과의사로, 1986년에는 기업체 중역으로, 1990년에는 정상회담 외교관과 여객기 기장으로, 그리고 1992년과 1997년에는 각각 여성 대통령 후보와 치과의사의 모습으로 등장했다. 이처럼 바비인형은 1960년대라면 다가설 수 조차 없었던 여러 가지 새로운 꿈을 소녀들에게 펼쳐주었던 것이다. 실제로 세계에서 가장 인기있는 인형인 바비는 탄생이래 모두 75가지 형태의 커리어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마텔은 직업외교관으로서의 역할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는 모습은 보여주지 못했다.
캘리포니아에 자리잡은 인형 메이커인 마텔은 바비의 다양한 상품화에 계속 열을 올리고 있다. 바비는 현재 무려 1만 5,000가지의 다양한 결합이 가능한 채비를 갖추고 있다. 의상과 눈, 피부색깔 등을 갖가지 형태로 바꿀 경우 그런 다양한 모습이 나올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긴다리만은 바꿀 생각이 없다. 이런 변화를 줄 수 있는 제품은 가격이 (일반 제품의 두배인)40달러나 된다. 이른바 매니지먼트 대가들의 판단은 옳았다. 어린이의 장난감은 대규모 상품화가 가능했던 것이다.
Disney - 디즈니
시카고 태생인 월터E.디즈니(Walter E. Disney, 1901∼1966)는 처음에 만화영화 제작자 아이웍스(Iwerks)밑에서 일하다 여러 번의 실패를 경험하고 1923년 21세의 나이로 형 로이와 함께 애니메이션 사업에 뛰어들었다. 그 해 디즈니사가 설립되고 디즈니는 출발부터 그 성과가 극도로 부진했다. 그러나 열차의 이층침대칸에서 수많은 쥐들이 찍찍거리는 소리를 듣고 '미키마우스'를 착안해 내어 '미키마우스'를 성공시킨 이후 '일곱 명의 난쟁이와 백설공주(Snow White and Seven Dwarfs), '피노키오(Pinocchio, 1940)', '판타지아(Fantasia, 1940), '덤보(Dumbo, 1941)', '밤비(Bambi, 1942)'등을 제작하여 대성공을 거두었다. 1955년에는 캘리포니아주 애너하임에 디즈니랜드를 개장시켰고, 1971년에는 플로리다주 올랜도에 디즈니월드를 개장했다.
디즈니가 사망한 이후 월트디즈니사는 1970년대에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이런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디즈니사는 외부로부터 마이클 아이스너와 프랭크 웰스를 초빙했다. 아이스너는 소신이 강한 사람으로서 월트디즈니란 마법의 왕국을 소생시킬 적임자였다. 그는 이 왕국을 되살리는데 필요한 힘과 나아갈 방향을 제시했다. 아이스너는 모든 면에서 디즈니가 가족단위의 오락을 즐길 수 있게 해주는 사업체라고 생각했다. 즉 디즈니사가 단순한 영화회사도, 테마파크 운영회사도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에 따라 아이스너는 디즈니의 시야와 활동범위를 넓혀나갔다. 그는 브랜드에 활력을 불어넣어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디즈니는 우선 유로디즈니(Euro Disney)사업을 벌이면서 자체의 브랜드 파워를 새삼 실감했다. 그에 따라 디즈니브랜드는 수많은 상품과 판매점, 도서, 비디오, 게임, 영화, 테마파크를 포괄하면서 그 영역을 넓혀 나갔다.
디즈니사의 자산가치는 1984년 15억달러에서 1997년에는 220억달러로 불어났고, 현재 세계 제2의 오락업체다. 디즈니의 테마파크에는 계속 많은 사람들이 몰려오고 있다. 월트디즈니 월드에는 한 해 3,200만명의 관람객이 찾아온다. 디즈니랜드에는 한 해 1,400만명, 디즈니랜드파리에는 300만명, 디즈니랜드 도쿄에는 520만명의 관람객이 몰려온다. 1995년에는 캐피털 시티즈/ABC를 190억 달러에 사들여 오락업체로서의 입지를 더욱 확고하게 다졌다. 그러나 '개미(Ants)'와 '이집트왕자(Prince of Egypt)'를 제작한 드림웍스의 경쟁이 만만찮아 디즈니의 어린이 오락부문이 전례없는 위협을 받고 있다.
Gerber - 거버
1927년, 딸에게 가장 좋은 것만 먹이고 싶었던 도로시 거버는 갖은 야채와 과일을 구해다가 깎고 찌고 갈고 걸러내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으면서 아기의 이유식을 만들어냈다. 다행히 아기는 그 이유식을 무척 좋아했지만, 너무 힘들었던 도로시 거버는 좀더 간편한 방법이 있지 않을까 고민을 하게 되고, 마침 당시 프레몬트 통조림 회사(Fremont Canning Company) 사장의 아들이었던 남편과 의논을 하게 되었다.
남편 댄과 그의 아버지 프랭크는 이 문제에 대해 깊이 생각을 했고, 그들은 시제품을 만들어 도로시 거버와 아기를 키우는 공장 직원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반응은 매우 열광적이었다. 아기들이 시제품을 너무 좋아했던 것이다. 회사는 유아식을 생산하기로 결정하고, 이름은 이 상품을 처음 구상한 가족의 이름을 따서 '거버'로 했다.
캔 유아식을 만들겠다는 것은 1928년 당시로서는 좀 위험한 결심이었다. 미국 부모들 대다수는 유아식이 그저 값비싼 사치품에 불과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프레몬트 통조림 회사(1941년 회사는 거버로 이름을 바꿨다)는 시장을 개척해야만 하는 위험한 임무를 떠맡았다.
하지만 댄 거버는 다른 엄마들도 도로시처럼, 편리한 것을 좋아하리라 확신했으나, 대량생산에 돌입하게 전에 초보엄마들을 대상으로 조사를 해보니 편하다는 것만 가지고는 안될 것 같았다. 정작 엄마들이 가장 바란 것은, 시장에 나와있는 것보다 더 다양한 과일과 야채를 아기에게 먹이는 것이었다.
비싸고 위험한 방법이긴 했지만, 거버는 여성지에 광고를 냈다. "쿠폰에 가장 좋아하는 식료품점 이름을 적어 단돈 1달러와 함께 보내주시면, 거버 수프와 야채 이유식 6개를 보내드립니다." 1달러 지폐와 쿠폰이 쏟아져 들어왔다. 이 광고 덕분에 거버는 전국으로 확산되었고, 연말쯤 60만캔 까지 팔려나갔다.
댄거버는 귀여운 아기 그림이 여성 독자들의 관심을 끌 것이라는 아이디어를 내놓았다. 회사는 딱맞는 얼굴을 찾기 위해 아기 그리기 대회를 열었다. 이 대회에서 우승한 화가 도로시 호프 스미스의 그림은 '거버베이비'로 유명해졌고, 1931년에는 공식 상표로 통조림에도 인쇄됐다.
미국에서 가장 신뢰받는 회사중 하나인, 수십억 달러짜리 이 회사가 다른 아기 상품을 내놓는 것은 시간 문제일 뿐이었다. 장난감, 유모차, 의류, 안전장치 등 회사는 계속적으로 신상품을 선보였다.
거버는 여러해 동안, 적대적인 혹은 그와 비슷한 방법의 인수를 거부해왔다. 그러나 1994년, 370억 달러에 스위스의 대기업 산도스에 인수되었다.
Lego - 레고
레고만큼 적절한 이름을 선택한 브랜드도 없을 것이다. 창업자인 올커크 크리스챤센(Ole Kirk Christiansen)은 덴마크어로 "잘 논다"(Leg와 Godt)를 합쳐서 "lego"를 만들었다. 또한 라틴어로 레고는 "책을 읽고 있다"거나 "함께 참여하고 있다"는 의미를 지닌다.
올 커크 크리스챤센은 1930년대의 대공황기에 덴마크에서 일자리를 잃고 말았다. 목수였던 그는 어린이의 상상력과 창의적인 소질을 자극할 수 있는 고급 장난감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는 요요도 만들고, 바퀴달린 코끼리 형상도 만들었다. 또 장난감 유모차와 자동차, 오리모양의 장난감 등을 제작했고, 그의 목제 장난감도 관심을 끌게되자 일손이 달려 다른 일꾼들을 고용하기 시작했다.
1940년대말쯤에는 레고에서 일하는 인력이 50명을 넘었고, 그 지역에서는 가장 규모가 큰 회사로 자리잡았다.
1955년에는 수많은 시도와 실험을 거친 끝에 그 유명한 레고 벽돌이 덴마크에서 그 모습을 드러냈는데 이 신제품은 이 회사가 앞서 만든 장난감과는 달리 완벽한 "놀이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다.
1958년 올커크 크리스챤센이 사망하고 그의 아들인 갓프레드가 경영권을 인수할 즈음 레고는 이미 상당한 성공을 거두고 있었다. 한 해 매출은 150만 달러를 넘어섰고, 1968년에는 최초의 레고 랜드를 개장함으로써 전혀 새로운 영역으로 진출하게 되었다.
1993년, 레고는 브랜드 확장을 시도해 어린이 의류 사업에도 진출했다. 레고와 덴마크의 의류 생산업체인 카부키 간의 라이센스 협정에 따라 레고 키즈믹스&매치웨어(Lego Kids' Mix&Match Wear)가 등장했는데, 스칸디나비아와 네덜란드 전역의 아울렛에서 판매되고 있다.
장난감 사업만큼 유행에 민감한 사업도 드물다. 레고는 끊임없는 이노베이션을 통해 생산·판매하는 제품의 참신함을 교묘하게 유지시켜 나갔다.
1970년대에 레고는 모터가 달린 동력 장난감 제조업체들의 도전에 대응하기 위해 레고모터를 내놓았다. 최근에는 종래의 전형적인 레고를 보완하기 위해 "기사와 드래곤", "공룡", "잃어버린 세계"등 일련의 테마별 레고 세트를 내놓음으로서 낡은 인상을 떨쳐버렸다.
다른 장난감업체와 달리 레고 브랜드가 지속적으로 활력을 유지할 수 있는 비결은 지속적인 이노베이션과 참신함을 잃지 않는데 있다. 현재까지 이 회사는 젊은 기운이 유지될 수 있도록 운영되었다. 이런 기운이 그대로 유지된다면 레고브랜드는 어린이들의 상상력이 시들지 않는 한 계속 살아남을 것이다.
BMW - 비엠더블유
'이 시대 최고의 명차'를 생산한다고 자부하는 BMW는 1916년 뮌헨에서 창업자 구스타프 오토, 칼 라프 등에 의해 항공기 엔진공장으로 출발했다. BMW의 상징이 된 엠블렘은 당시 비행기의 프로펠러를 형상화한 것이고 파란색과 흰색은 본사가 있는 바이에른주의 상징이다. 또 하나의 상징은 콩팥모양의 키드니 그릴이다. 이 형상은 1931년 일(Ihle)형제가 처음 만들었고, 33년 베를린 모터쇼에 소개된 신형 303시리즈에 달리면서 BMW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었다. 창립이듬해인 1917년 바이에리쉐 모토렌 베르케(Bayerishe Motoren Werke)라는 설비회사를 인수하면서 약자인 BMW를 회사이름으로 쓰기 시작했다. BMW가 만든 항공기 엔진은 1차대전때 독일 공군기에 쓰였다. 패전국이 된 독일은 베르사이유 조약에 의해 항공기 엔진을 포함한 무기류를 생산할 수 없게 되었다. 위기를 맞은 BMW는 모터사이클로 눈을 돌렸고 항공기 엔진 제작기술을 바탕으로 한 BMW의 모터사이클은 뛰어난 성능으로 인기를 끌었다. BMW의 모터사이클 사업은 지금도 활발하게 진행되어 미국 할리 데이비슨에 견주는 유럽명문으로 자리잡았다. 자동차 생산은 1928년 시작했다. 영국의 오스틴 세븐을 라이센스로 만들던 딕시사를 흡수해 3/15딕시를 선보인 것이 그 시작이다. BMW는 자동차 메이커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고유모델을 만들어야 한다고 판단해 1932년 827cc 20마력 엔진을 얹은 3/20을 내놓았다. 1932년 1.5l 엔진을 얹은 315를 개발했고, 33년에는 2.0l의 319를 내놓았다. 319는 BMW의 첫 경주차이기도 하다. 1936년에는 6기통 2.0l 80마력 엔진을 얹은 로드스터 328 이 각종 자동차 경주에서 우승을 휩쓸면서 BMW 최고의 명차로 떠올랐다. 이후 1951년 전후 첫모델로 501을 발표하고 56년 502, 503, 507을 차례로 선보였다. 66년에는 생산기지를 본사가 있는 뮌헨에서 근교 딩골핀으로 확대했고, 1600의 2세대 모델 1600-2로 시작되는 02시리즈가 히트해 명성을 얻게 된다. 후속모델인 1600TI, 1802, 2002 등이 잇따라 성공하면서 BMW는 고성능 자동차 메이커라는 이미지를 다지게 된다. 뮌헨올림픽이 열리던 72년에는 5시리즈를 생산하면서 세계시장 진출에 적극 나섰다. 5시리즈의 성공으로 BMW는 벤츠를 위협하는 메이커로 떠올랐고, 3, 6, 7, 8시리즈를 연달아 발표하며 눈부신 성장과 함께 오늘에 이른다.
BMW는 현재 세계 120여개국에서 16개의 생산공장과 1천여개의 딜러를 운영하고 있다. 92년에는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스파르탄버그에 현지 공장을 설립해 Z3를 생산하고 있다. 94년 베른트 피세츠리더 회장이 취임한 이후 해외시장 개척에 더욱 힘을 쏟고 있는 BMW는 같은해 영국의 로버를 인수하면서 생산규모가 100만대를 넘어섰고 그동안 BMW에 없었던 SUV를 갖게 되었다. 그러나 인수 6년째 되던 2000년 로버와 랜드로버를 다시 벤처 캐피탈회사와 포드에 각각 넘김으로써 BMW와 미니, 롤즈로이스 브랜드만 남게 되었다. 98년에는 영국 비커스그룹과 롤즈로이스사 매입에 합의해 대규모 자동차 그룹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99년 들어 BMW는 SUV붐에 맞춰 X5를 내놓았고, 2000년에는 새 스포츠카 Z8도 더했다. BMW는 다음 세기에도 가장 영향력 있는 메이커의 하나가 될 것이다.
GM - 지엠
포드가 단일기업으로 성장해온 것에 비해 GM은 여러회사들의 합병으로 시작되었다. 1904년 미국의 플리트시에서 마차 제조업을 하던 윌리엄 듀런트는 쓰러져가는 뷰익을 인수한다. 마차제조업에서 크게 성공한 그는 타고난 사업가였다. 자동차가 마차를 대신할 시대가 올 것을 자신했다. 듀런트는 1904년 28대 밖에 만들지 못한 뷰익을 손에 넣은지 4년만에 연산 8천820대를 자랑하는 회사로 키웠다. 듀런트는 뷰익의 성공을 바탕으로 다른 군소메이커의 인수에 들어갔다. 랜섬올즈가 창립해 커브드 대시를 만들고 있던 올즈를 1908년 흡수하면서 회사이름을 '제너럴 모터즈 컴퍼니'로 바꾸었다. 이후 캐딜락, 오클랜드 등을 차례로 합병해 오늘날 GM의 기초를 다졌다. 그러나 1910년 모기업격인 뷰익이 판매부진에 빠지자 자금압박을 받기 시작했고 듀런트는 은행에서 융자를 받는 대신 경영권을 넘겨주지 않으면 안되었다. GM에서 물러난 듀런트는 시보레를 인수해 베이드 그랜드와 로얄메일등 대중차를 생산해 큰 성공을 거두었다. 시보레 판매가 늘자 듀런트는 시보레의 주식과 GM의 주식을 맞바꾸기로 하고 재벌가의 후원을 얻어 5년만에 GM 사장으로 복귀했다. 이듬해인 1916년 GM은 회사체제를 새로이 정비하고 '제너럴 모터즈 코퍼레이션'이란 이름으로 새출발했다. 1920년대 들어 듀런트는 GM을 떠나게 되고 알프레드 슬론에게 경영권이 넘어갔다. 자동차 그룹은 시보레, 뷰익, 올즈모빌, 오클랜드(현재의 폰티액), 캐딜락 사업부로 구성되었다. 1911년 해외 수출 전담회사를 세운 GM은 유럽공략에 나서 25년에는 영궁의 복스홀을, 30년에는 독일 오펠을 사들였다. 이들 업체들은 다른 디비전처럼 각자의 브랜드를 그대로 내걸고 지금까지 차를 생산하고 있다. 미국차가 전성기를 누리던 50∼60년대 GM의 모델로는 하리 얼이 디자인한 뷰익르세이버, 스카이락, 캐딜락 엘도라도, 시보레 코베트 등이 있다. 60년대 들어 유럽의 소형차들이 판매를 늘리기 시작하자 발빠른 GM은 미국 최초의 컴팩트카인 시보레 코르베어를 내놓고 컴팩트카 생산에 나섰다. 70년대 두차례의 오일쇼크 등으로 시련을 겪게 되자 GM은 유럽의 자회사인 오펠, 일본의 이스즈, 한국의 신진(대우의 전신) 등과 손잡고 월드카 생산에 나섰다. 70년대 중반 선보인 GM의 월드카는 부품을 함께 쓰면서도 제각기 이름과 모양을 달리했다. 오펠 카데트, 이스즈와 새한의 제미니, GM의 시베트 등이 그런 모델들이다. 80년대 일본 소형차가 미국시장 점유율을 높여가자 이에 대한 대응책으로 나온 것이 새턴 프로젝트다. 90년대 들면서 GM은 소형차 새턴, 고성능 엔진을 얹은 새 캐딜락 등을 발표하면서 활기를 되찾았다. 86년에는 영국 로터스를 인수하고 90년에는 스웨덴 사브의 주식 50%를 사들였다. 그러나 로터스는 94년 이태리의 부가티로 넘겼고 사브는 99년 나머지 주식도 모두 매입해 완전한 자회사로 만들었다. 90년 역사를 가진 GM은 많은 명차를 만들고 판매와 경영의 혁신으로 세계 선두자리에 올랐다. GM은 부품회사에서 금융, 정보, 미래의 테크놀로지 개발에 이르는 다양한 사업부문으로 세계 최대의 자동차 기업을 넘어 세계 최대의 기업으로 자리잡고 있다.
Honda - 혼다
흔히 '기술의 혼다'라는 말을 한다. 혼다에 쏟아지는 '기술왕국'이라는 찬사는 하루아침에 얻은 것이 아니다. 창업자 혼다 소이치로(本田宗一郞, 1906∼1991)의 능력과 집녑이 이루어낸 성과다. 소이치로는 일본인들이 가장 존경하고, 본받고 싶어하는 신화적인 인물이다. 혼다 소이치로는 1906년 시즈오카현의 작은 마을에서 대장장이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경주차를 만들고 싶었던 꿈을 이루기 위해 포드엔진에 수퍼차저를 단 독창적인 레이싱카를 제작해 트랙레이스에 참가하기도 했다. 1948년에 혼다기술 연구소를 설립해 모터사이클을 만들기 시작했다. 당시 대부분의 메이커가 외국회사와 합작으로 자동차, 모터사이클을 만들고 있었다. 그러나 소이치로는 독자기술을 고집했다. 이런 배경을 바탕으로 하기에 혼다는 기술에 앞선 메이커라는 평판을 얻을 수 있었다. 혼다가 자동차 만들기에 첫발을 내 딛은 것은 다른 메이커에 비해 늦은 1962년이었다. 소형 스포츠카 S500과 S360이 혼다 자동차의 시작이다. S시리즈는 배기량을 높여 S600과 S800으로 발전했다. 66년에는 첫 승용차 N360을 선보였다. N360은 20개월동안 20만대가 팔리는 성공을 거두었다. 72년에는 혼다 대표모델로 자리한 시빅이 등장해 본격적인 승용차 메이커로 인정받게 된다. 초대 시빅은 79년까지 생산되었고, 지금 팔리는 시빅은 6세대다. 76년 등장한 어코드는 대단한 인기를 누리며 전체 일본차의 대명사가 되었다. 어코드는 89∼91년 세차례에 걸쳐 미국 베스트셀러에 올랐고, 97년 등장한 신형도 지금까지 포드 토러스, 도요다 캠리와 베스트셀러 자리를 다투고 있다. S500 이후 혼다 스포츠 전통을 잇는 본격 스포츠카 NSX는 95년 데뷔했다. 제작비가 많이 드는 알루미늄 모노코크 보디를 썼고 V6 3.0l VTEC 엔진을 미드십에 얹어 세계적인 선풍을 일으켰다. 혼다는 최근들어 승용차 위주의 정책에서 벗어나고 있다. 예전에는 이스즈 로데오와 트루퍼에 혼다 상표를 붙여 재즈, 호라이즌이라는 이름으로 팔았다. 그러나 RV의 시장이 날로 커지자 95년 독자개발한 미니밴 오디세이를 내놓아 돌풍을 일으켰고 같은 해 오프로더 CR-V를 추가했다. 86년 미국 고급차시장 진출을 위해 일본 메이커 최초로 설립한 독립 디비전 어큐라는 96년 CL이라는 독자개발 모델을 선보이며 독립을 선언하고 나섰다. 혼다의 역사에서 기술발전의 원동력이 된 모터스포츠를 빼놓을 수 없는데 혼다가 F1 세계에 정식으로 발을 들여놓은 해는 1964년 독일 GP였다. 혼다의 첫작품 RA271은 그 해 3회의 레이스에 참가해 모두 리타이어 했다. 그러나 이듬해 8회의 경기중 최종전이었던 멕시코 GP에서 우승해 또 한번 신화를 만들었다. 혼다엔진은 윌리엄즈와 맥라렌 경주차에 앉혀 80년대 말부터 정상을 구가했다. 그러나 오랜 독주로 흥미를 잃었기 때문인지 혼다는 93년 F1에서 철수해 미국 인디레이스에 도전했다. 이후 혼다 엔진은 96년 치프 가내시, 헐 레이싱팀 등에 얹혀 우승을 차지했다. 92년에는 태양에너지를 이용하는 솔라카랠리에 눈을 돌려 세계대회를 휩쓸었고, 지난 10월 열린 호주의 솔라카 랠리에서도 신형드림호로 우승을 차지했다. 승용차쪽에서는 RV 3탄인 스텝왜건과 새 소형차 라고를 발표하며 시대에 뒤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솔라카, RV등 새로운 분야에 진출할때도 혼다는 항상 독자기술을 이용한다. '기술이 최고'라고 여겼던 혼다소이치로의 철학이 아직도 살아 숨쉬고 있다는 증거다. 이런 철학과 자존심을 바탕으로 99년 선보인 2인승 로드스터 S2000은 2.0l 자연 흡기엔진으로는 최고수준인 241 마력의 고성능을 발휘해 큰 인기를 모으고 있다.
Mercedes-Benz - 벤츠
벤츠는 '최고급차의 대명사', '안전의 대명사'로 불리는 독일 메이커다. 이러한 명성은 '최고가 아니면 만들지 않는다(Das beste, oder nicht)'는 창업정신에 기초한다. 110여년에 이르는 벤츠의 역사는 곧 자동차의 역사다.
벤츠의 창업자는 고틀리프 다임러(1834∼1900)와 칼벤츠(1844∼1929)다. 서로 멀지 않은 곳에 살고 있으면서 비슷한 시기에 휘발유차를 발명한 두 사람은 각자 서로의 영역에서 발전을 거듭했고 한사람은 벤츠사, 다른 사람은 다임러사를 만들었다. 20세기 들어 후손들이 경영하던 다임러사는 벤츠사와 자동차 시장과 자동차 경주에서 맞부딪치면서 라이벌이 되었다. 벤츠가 경쟁에서 밀리기 시작한 것은 다임러가 개발해 1901년 생산을 시작한 메르세데스의 인기 때문이었다. 이 차는 당시 다임러의 오스트리아 판매대리인이었던 에밀 옐리네크의 딸 메르세데스의 이름을 딴 것이다. 옐리네크는 자동차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독일의 다임러사를 알게 되고 고틀리프 다임러를 만나 그의 차를 여러 대 사게 되었다. 1900년 다임러가 휠베이스를 넓히고 엔진을 개선한 새 모델을 내놓자 옐리네크는 36대의 차를 주문하면서 두가지 조건을 걸었다. 하나는 그가 오스트리아, 헝가리, 프랑스, 미국의 독점 대리점 영업권을 갖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차에 그의 딸 이름을 써달라는 것이었다. 다임러는 옐리네크의 조건에 당황했지만 받아들였다. 메르세데스는 나오자마자 큰 인기를 끌었다. 이후 다임러사는 모든 차에 메르세데스라는 이름을 썼고 1902년에는 상표로 사용하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다임러는 사라지고 메르세데스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1902년 다임러가 내놓은 메르세데스 심플렉스도 인기를 모았다. 벤츠는 메르세데스 심플렉스에 대항해 파지할을 내놓았는데 두 메이커의 경쟁은 선박과 항공기에까지 이어지면서 20세기 전반을 장식했다. 두 메이커의 차 만들기는 각각 특징이 있었다. 레이스에 관심을 가졌던 다임러는 스피드에 역점을 두었고, 벤츠는 기술과 안전에 주목했다. 1920년대 독일은 1차대전에서 져 극심한 불황에 빠졌고 자동차 산업도 예외는 아니어서 벤츠와 다임러사는 살아남기 위해 합병을 추진했다. 결국 1926년 손을 잡게 되었는데 회사명은 다임러 벤츠, 경영은 칼벤츠가 맡았다. 이후로 다임러 벤츠의 모든 상품에는 메르세데스 벤츠라는 이름이 붙었고 상표는 1916년부터 다임러가 써온 세꼭지별로 결정되었다. 이는 육,해,공으로 뻗어나가겠다는 의지를 나타낸 것이다.
메르세데스 벤츠라는 이름을 처음 쓴 차는 슈투트가르트와 만하임이고 1929년에는 고급형 뉘르부르크가 나왔다. 1930년대 벤츠는 세계 각국의 군주나 원수가 즐겨 탄 그로서와 가장 아름답고 호화로운 유선형 스포츠카 MB500K 등을 내놓았다. 1936년에는 세계 최초의 디젤차인 260D를 내놓았다. 1954년 벤츠는 불후의 명차로 기록되는 300SL을 발표했고 뒤이어 나온 190SL은 오늘날 SL 시리즈의 기원이 되었다. 82년에는 소형차 190시리즈를 내놓아 더욱 다양한 모델을 갖추게 되었다. 이런 벤츠는 90년대 들어 첫 시련을 맞게 되고 체질개선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대두되면서 대중차 만들기에 들어갔다. 벤츠의 대중차 전략은 93년 프랑크푸르트 모터쇼에 소형 컨셉트카 비전 A93을 내놓으면서 표면화되었고 97년 A클래스를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또한 해외생산을 크게 늘려 미국 앨라배마 공장에서 SUV M클래스를 내 놓고 프랑스에서는 스와치와 공동으로 스마트카 생산에 들어갔다. 벤츠는 93년 C클래스를 발표하고 이듬해인 94년 흑자로 돌아섰다. 95년 9월에는 복고풍의 E클래스를 내놓아 다시 한 번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벤츠의 변신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창립 72주년이 되던 98년에 미국 크라이슬러와의 합병을 발표해 세계 자동차업계를 뒤흔들었다. 현재 벤츠는 메르세데스 벤츠의 이름으로 소형차 A클래스와 C,E,S클래스로 이어지는 중·대형 세단, SL, CLK 등 스포츠카, SUV M클래스, 4WD G바겐을 생산하고 다임러그룹에서 미니밴인 V클래스와 중대형 트럭, 버스 등을 만들고 있다. 새로 탄생한 다임러-크라이슬러는 1만 달러대의 값싼 모델부터 13만 달러에 이르는 최고급까지 넓은 가격대의 모든 차종을 갖추고 있다. 고급차 메이커에서 세계 3위의 거대 자동차 기업으로 부상한 벤츠의 변신을 세계가 주목하고 있다.
Volkswagen - 폴크스바겐
98년 5월 7일, 전 유럽 자동차 메이커를 놀라게 한 사건이 있었다. BMW의 롤즈로이스 인수가 굳어질 무렵, 폴크스바겐이 BMW보다 훨씬 높은 가격을 제시해 롤즈로이스를 가로챈 것이다. 이로써 폴크스바겐은 소형차뿐만 아니라 중형차(아우디), 초호화세단(롤즈로이스)을 아우르는 대메이커의 위치를 탄탄하게 다지게 되었다. 최근 유럽 최고의 뉴스메이커로 불리고 있는 폴크스바겐은 1930년 독일남부의 슈투트가르크에서 페르디난트 포르쉐 박사가 '타입8반더러'를 완성하면서 역사가 시작되었다. 당시 독일의 실제적인 통치자였던 히틀러는 모든 국민이 자가용을 갖게 하겠다는 뜻을 밝히고 개인연구소를 운영하던 포르쉐박사에게 '어른 두명과 어린이 세명이 탈 수 있는 차, 연료 1l로 14.5km 이상을 달릴 수 있으며 정비가 쉬운차, 그리고 값은 1천마르크 이하인 차'를 설계해 달라고 주문했다. 이렇게 해서 1934년 프로토타입이 만들어지고 공장까지 지어졌다. 공장기공식에 참석한 히틀러는 새 국민차에 '카데프(KdF, Kraft der Freude의 머릿글자, 기쁨의 힘)'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 차는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으나 1939년 2차대전이 터짐으로써 양산되지 못했다. 공장에서 조립중이던 국민차는 급히 군용차로 변경되어 악명높은 독일군과 나치 친위대를 태우고 전장과 시가지를 누볐다. 2차대전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퀴벨바겐과 슈빔바겐 등이 그것이다. 전쟁이 끝난 뒤 연합군의 배려로 공장이 재건되었고 국민차가 굴러나오기 시작했다. 폴크스바겐은 재정적인 어려움 때문에 한때 미국 메이커와 합병을 원했으나 GM, 포드 등이 이익이 남지 않는다고 외면했다. 하지만 50년대 중반 이후 사정은 달라졌다. 미국시장에도 진출했으나 미국시정에 맞지 않는 너무 작은 차체와 소극적인 판매전략으로 판매부진을 면치 못했다. 독일에 주둔한 미군들이 이 차를 갖고 귀국해 '비틀(딱정벌레)'이라는 애칭을 붙여주기 시작하면서 미국시장에서도 인기가 올라 1959년 유럽메이커로는 처음으로 100대 생산을 돌파했다. 비틀의 높은 인기를 이용한 개조모델도 선보였다. 55년에 나온 카르만기아가 대표적 예다. 61년 VW는 VW1500을 내놓았고 65년에는 패스트팩 타입의 1600L도 선보였다. 78년 많은 인기를 모았던 비틀은 아쉬움을 남긴채 사라졌다. 비틀이 단종되자 독일에서는 차에 검은 리본을 달고 '비틀, 너를 영원히 사랑해'라는 문구를 써붙이고 생산재개를 요구한 소동이 일었다고 한다. 구형비틀은 98년 뉴비틀이 나오기까지 브라질에서 계속 생산되었다. VW은 70년대 들어 새로운 타입의 차를 만들었는데 파사트(73년)와 골프(74년)다. 특히 골프는 비틀에 버금가는 큰 인기를 얻으며 VW의 주력차종으로 자리매김했다. VW은 74년 3월에 시로코, 75년 폴로, 77년 데비, 79년 제타, 81년 산타나 등 소형차를 차례로 내놓았다. 창립 50주년을 맞는 1988년에는 제3세대 파사트와 코라도를 선보였다. 현재 생산되는 모델은 루포와 루포3LTDI, 폴로, 뉴비틀, 골프Ⅳ, 골프세단인 보라, 골프 카브리오, 파사트, 샤란 등이다. 롤즈로이스와 람보르기니를 갖고 있는 폴크스바겐은 더 이상 '소형차의 명문'으로만 남지 않을 것이다. 지난해 프랑크푸르트 모터쇼에서 발표된 컨셉트카 D1은 폴크스바겐이 대형차 시장에 첫발을 내딛는 역사적인 모델이다. VW은 BMW M시리즈와 벤츠AMG 버전에 대항하는 고성능 버전들도 내놓고 있다. 골프세단형인 보라의 보디패널을 경량소재로 바꾸고 V6과 V8엔진을 얹은 보라 RSi가 대표적인 예다. 올해 2월 디트로이트 모터쇼에서는 4인승 고급세단뒤에 짐칸을 단 네바퀴굴림 크로스오버카인 컨셉트카 AAC도 선보였다. 폴크스바겐의 공격적인 경영은 현재 진행중이고,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이처럼 저돌적인 개혁을 해나가고 있는 인물은 93년 취임한 페르디난드 피에히 회장이다. 포르쉐박사의 외손자인 그는 포르쉐911 개발에 관여했던 일류 엔지니어이기도 하다. 피에히가 이끄는 한 폴크스바겐에는 후퇴란 없을 것이다.
Apple - 애플
애플은 멋진 모양의 인터넷 컴퓨터 아이맥(iMac)을 내놓으면서 그동안 위축일로에 있던 사세(社勢)를 끌어올릴수 있으리란 기대를 갖게 되었다. 아이맥을 광고하는 포스터에는 애플로고와 함께 "생각을 바꾸자"라는 슬로건이 들어있었다. 이 같은 광고캠페인에는 애플이란 브랜드의 지속적인 소구력이 그대로 응축되어 있다.
한때 애플은 미국 기업계와 컴퓨터 업계에서 그야말로 히피같은 존재였다. 대학을 중퇴한 두 청년-스티브잡스(Steve Jobs)와 스티브 워즈니액(Steve Wozniak)-이 차고에서 설립한 이 회사는 애플1과 애플2, 애플 매킨토시를 내놓으면서 컴퓨터의 위상을 일신시켰다. 즉, 애플은 보통 사람이라면 누구나 컴퓨터를 이용할 수 있게 만들었던 것이다. 더구나 베이지색의 박스형을 벗어나지 못한 컴퓨터 시장에서 애플컴퓨터의 외관은 그야말로 군계일학이었다. 한동안 애플은 컴퓨터 시장을 20%나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다. 애플컴퓨터는 소유자의 아이덴티티까지 드러내 주었다. 애플소유자들은 넥타이와 양복바지 대신 진 바지와 운동화 차림에 그 나름의 독특한 태도를 보인다.
두 설립자는 헤어져 워즈니액은 교사가 되었고. 잡스는 계속해서 애플 매킨토시를 내 놓으면서 컴퓨터업계를 제패하겠다는 의욕을 보였다. 그러나 왕관은 빌 게이츠에게 돌아갔다. 컴퓨터 구매자의 80%가 빌게이츠의 MS-DOS를 운영체제로 활용했기 때문이다.
그후 잡스는 1985년 회사에서 쫓겨났지만 13년 뒤 다시 "임시 CEO"란 직책으로 복귀했다. 잡스가 경영권을 장악한 후 애플은 그 어느때보다도 과거의 모습을 되찾았다.
자칭 "임시 CEO"를 맡은 이후 잡스는 자신이 애플에 판매한 운영시스템인 넥스트(Next)와 결손을 내는 라이센스 계약을 폐기하고 아이맥의 잠재성에 눈을 떴다.
사실 아이맥 속에는 잡스가 만족스럽게 생각하는 것이 모두 구현되어 있었다. 눈길을 끄는 디자인하며 간단한 작동이 그런 것이다. 또한 아이맥은 색다른 면이 많았다. 아이맥에는 디스크 드라이브가 없는 것이다. 잡스는 지프 드라이브 같은 외부저장장치로 디스크 드라이브가 대체되었다고 믿는다. 그는 또 PC와 TV가 공용화 추세를 보인다는 일반적인 견해에 동조하지 않는다. 이런 문제에 대한 잡스와 빌게이츠의 판단중 어느 쪽이 옳으냐에 따라 두 회사의 장래가 결정될 것이다.
한편 아이맥은 애플의 사운(社運)을 되살릴수 있는 최상의 기회를 제공하는 것처럼 보인다. 애플의 오너들은 항상 열정적이고 사나운 기세를 보였고, 고객들의 브랜드 충성도도 높은 편이었다. 그러나 아이맥과 연관된 뉴스 중 가장 반가운 것은 아이맥 매출의 약 40%가 신규 고객이라는 점이다. 이는 애플 브랜드가 새로운 세대의 컴퓨터 고객을 끌어들일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Hewlett Packard - 휴렛패커드
휴렛패커드는 1937년에 첫선을 보였다. 당시 빌 휴렛(Bill Hewlett)과 데이비드 패커드는 팔로앨토에서 임대한 차고와 단돈 538달러로 사업을 시작했다. 두 사람은 스탠포드 대학 재학중 서로 알게 되었다. 이들의 욕심은 사업에 뛰어들려는 많은 젊은이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이었다. "우리 자신을 위한 일을 갖겠다는 생각이었다. 처음에는 그런 생각 뿐이었다." "대기업을 일으키겠다는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이 차고야말로 실리콘밸리의 산실이기도 하다. 사업을 시작한 첫해에 휴렛패커드는 1,300달러의 이윤을 얻었다. 휴렛패커드의 첫 성공작은 음파 측정 장치로 월트디즈니에 판매하여 상당한 이득을 올렸다. 뒤이어 체중을 줄이려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몇 가지 기구를 만들어냈고, 자동 수세 장치와 볼링판 센서, 에어컨 장치 등의 판로도 모색했다. 그러다가 두 사람은 1940년애 팔로앨토의 허름한 차고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사업이 잘 되던 한때는 종업원수가 144명이나 되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자 곧바로 매출이 격감했고, 1946년에는 절반수준으로 줄어들었다. 그렇다고 기가 꺽일 두 사람이 아니었다. 이들은 기술력이 뛰어난 사람들을 고용했고, 사업은 다시 회복세를 보이기 시작해 1948년에는 매출이 210만달러에 이르렀다. 휴렛과 패커드는 자시들의 성공비결이 경영방식의 단순성에 있다고 설명했다. 1996년 패커드가 숨을 거두었을 당시 휴렛-패커드는 전세계 120개국에 모두 10만명의 직원을 거느리게 되었고, 매출은 310억 달러에 이르렀다. 현재도 이 회사는 성장과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이 회사의 경영책임을 맡고 있는 루플래트(Lew Platt)는 휴렛패커드가 이른바 "건강한 편집병"을 옹호해야 하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제너럴 모터스, 시어즈, IBM 등은 모두 해당산업부문에서 가장 훌륭한 기업이자 세계 최우량 기업중의 베스트였다. 이들 기업은 큰 실책을 범한 일이 없었다. 이들 기업을 이끌어가는 인물은 어리석거나 무기력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이들은 진짜 한가지 실책을 저질렀다. 꽤 오랫동안 이들을 성공으로 이끌었던 방식을 그대로 견지한 점이 그것이다."
IBM - 아이비엠
IBM은 토머스 왓슨(Thomas Watson Senior, 1874∼1956)이 1914년에 뛰어든 컴퓨팅-태블레이팅-리코딩 컴퍼니(Computing-Tabulating-Recording Company)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 회사는 왓슨이 경영책임을 맡으면서 1917년에는 수입이 420만달러에서 830만 달러로 두배나 늘어났다. 처음에는 정육점 저울에서부터 고기절단기에 이르기까지 온갖제품을 만들어냈지만 점차 펀치 카드로 정보를 처리하는 태블레이팅 머신에 주력하게 되었다. 왓슨은 회사의 명칭을 인터내셔널 비즈니스 머신즈(International Business Machines)로 바꾸었다. 당시로서는 꽤 거창한 명칭이었지만, 어쨌든 IBM Japan은 제2차 세계 대전 이전에 이미 설립되었다.
IBM은 1937년에 제정된 근로시간-임금규제법 때문에 성장과 발전에 적잖은 도움을 받았다. 이법에 따라 미국 기업들은 근로시간과 지불한 임금액을 기록해야만 했다. 그러나 기존의 기기로는 이런 기록이 불가능하자 왓슨은 문제해결에 전력을 다했다. 결국 1944년에 마크 1(Mark 1)이 등장했고, 뒤이어 1947년에는 셀렉티브 시퀀스 일렉트로닉 캘큐레이터(Selective Sequence Electronic Calculator)가 나왔다. 그즈음 IBM의 수입은 1억 1,900만 달러에 달했는데, 이런 엄청난 매출을 바탕으로 세계 최대의 컴퓨터 회사와 세계 최고가의 브랜드가 되는 대도약을 이룰 수 있었다.
왓슨 Sr.가 서비스 중심적인 IBM 브랜드와 강력한 기업문화를 만들어 냈다면, 그의 아들 왓슨 Jr.(1914∼1994)는 IBM을 탁월한 기업에서 세계를 석권한 대기업으로 키워냈다. 왓슨Jr.는 아버지에게 부족했던 미래에의 비전을 제시했다. 그러나 본래의 브랜드 파워는 조금도 손상되지 않은 채 그대로 유지했다.
IBM은 한때 전세계 컴퓨터 산업 수익의 70%를 차지했으나 기업과 일반고객들이 PC가 서로 별다른 차이가 없다는 사실을 알고난 뒤부터는 굳이 더 많은 돈을 지불하면서까지 IBM 브랜드를 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마침내 IBM 브랜드는 1993년에 세계 3위로 밀려나게 되었고 점점 더 쇠퇴하게 되었다.
이후 IBM은 매킨지사의 컨설턴트 출신이었던 거스트너가 CEO로 영입되면서부터 놀라울 정도로 견실한 회복세를 보였는데, 여기에는 인터넷의 활성화가 큰 힘이 되었다. 오랫동안 IBM에서 근무해온 존 패트릭(John Patrick)은 인터넷이라는 최신기술을 활용해 고객과 시장의 동향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회사 내부적으로 원활한 커뮤니케이션을 이뤄나가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거스트너는 인터넷의 위력을 실감한 뒤 이런 반응을 보였다. "정말 대단하다. 새로운 비즈니스 채널이라고 할 만하다. 어떻게 하면 고객을 위해 이것을 활용할 수 있겠는가? 또 어떻게 하면 이것으로 돈을 벌 수 있겠는가?" 이처럼 고객을 먼저 앞세우고 그 다음 회사의 수익에 걱정하는 태도가 IBM의 부흥에서, 또 IBM 브랜드의 흥망과 재기에서 얻을 수 있는 가장 값진 교훈일 것이다.
Microsoft - 마이크로소프트
마이크로소프트 브랜드의 부상은 곧 비즈니스계의 큰 변화를 나타내는 것이다. 지금까지 MS-DOS와 같은 무형의 컴퓨터 프로그램이 브랜드화한 경우가 처음일 뿐만 아니라 이런 브랜드화한 무형의 대상이 전통적인 실물 브랜드보다 더 큰 위력을 발휘했기 때문이다. 빌게이츠는 마이크로소프트를 통해 이른바 지력(知力)을 브랜드로 만들었던 것이다.
마이크로소프트는 1970년대 중반 게이츠와 그의 오랜 친구인 폴 앨런이 설립했는데, 1980년대 후반경에는 월스트리트의 총애를 받는 기업이 되었다. 1986년 2달러이던 마이크로소프트의 주가는 1996년 상반기에 무려 105달러로 50배이상 폭등해 게이츠를 억만장자로 만들었을 뿐 아니라 그의 많은 동료들도 부자가 되었다.
게이츠는 마이크로소프트 사를 창업한 초기부터 "모든 책상 위와 모든 가정에 컴퓨터 한 대씩을"이라는 원대한 비전을 추구해오다가 최근 소프트웨어가 "이루어줄 수 있는 역할"을 반영하는 쪽으로 브랜드 포지션을 바꾸었다. 그에 따라 나온 가장 유명한 슬로건이 "오늘은 어디로 가고자 하느냐?"는 것인데, 이 슬로건은 사실 "모든 책상 위와 모든 가정에 개인용 컴퓨터 한 대씩을"이라는 슬로건의 자연스런 속편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떤 의미에서 PC혁명은 이미 성공을 거두었고, 이제 새로운 싸움터는 고객들의 상상력을 겨냥하는 것이다.
게이츠는 마이크로소프트를 컴퓨터 업계의 유력한 존재로 만들고 다시 그런 위치를 활용해 엄청남 성장이 기대되는 소프트웨어 응용부문의 표준을 설정함으로써 자신의 비전을 성취시키겠다고 결심했다.
빌게이츠가 다른 회사로부터 5만달러를 주고 매입한 운영시스템인 Q-DOS가 마이크로소프트 사에 의해 MS-DOS로 명칭이 바뀌었고, 그는 자신의 카드를 잘 활용하기만 하면 MS-DOS가 컴퓨터 업계의 표준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게이츠의 운영시스템 뒤에는 막강한 IBM 브랜드가 버티고 있었고, 그 때문에 게이츠의 운영체제는 마이크로소프트 브랜드에 힘을 실어주었다.
1980년대초 게이츠는 프로그래밍 언어 개발업체로부터, 윈도와 같은 운영체제에 이르기까지 온갖 소프트웨어를 만들어내는 회사로 탈바꿈하는 과정을 주도했다. 그 과정에서 게이츠는 컴퓨터업계에 큰 변화의 바람을 불러일으키면서 세계 최대의 무형브랜드를 창조했던 것이다.
Hagen-Dazs - 하겐다즈
하겐-다즈는 1961년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뉴욕의 사업가인 루빈 매터스(Reuben Mattus)가 만들어낸 브랜드였다. 그의 꿈은 세계 최고의 아이스크림을 만드는 것이었다.
1932년, 그의 주도 아래 세너터 프로즌 프로덕트 사가 브롱크스에 설립되었다. 그는 1950년대 후반까지 이 회사를 성공적인 기업으로 성장시켰다. 이 회사는 시로(Ciro)라는 이름의 아이스크림을 만들어 잡화점을 통해 판매했다. 그러나 매터스의 시로 아이스크림이 얼마가지 않아 대형업체 제품에 밀려나게 되자 그는 다른 아이디어를 들고 나왔다. 즉 고급브랜드로 승부하겠다고 작정했던 것이다. 신선한 크림과 진짜 과일, 천연재료 등을 사용해서 고급 아이스크림을 만들어 경쟁하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브랜드도 색다른 것을 선택해 마케팅에 나서겠다고 결심했다. 그래서 덴마크를 연상케 하는 특이한 명칭을 골라 기존의 브랜드들과 뚜렷한 차별화를 이루었다.
고객들의 반응은 즉각 나타나게 되고, 결국 시로의 생산은 중단되었다.
매터스는 하겐-다즈 브랜드 활용 범위를 확대하는 방안을 모색했다. 단순히 아이스크림 브랜드로만 이용할 것이 아니라 그 자체를 소매채널로 활용하는 방안을 검토했던 것이다. 매터스의 딸은 하겐-다즈 제품만을 취급하는 소매점을 직접 운영하자는 의견을 내놓았다. 첫 번째 스토어가 브룩클린에 개점된 데 이어 미국 전역에 걸쳐 수많은 하겐-다즈 스토어가 문을 열었고, 이후 캐나다, 일본, 유럽으로도 진출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이면에서는 하겐-다즈의 경영권이 부산하게 이동하고 있었다. 하겐-다즈는 1983년에 필스버리 그룹에 인수되었고, 1989년에 다시 그랜드 메트로폴리탄에 인수되었다. 1980년대에는 아이스크림 외에 새로운 제품이 추가되었다. 냉동 요구르트 바와 아이스크림 스틱바, 냉동케이크 등이 그런 것이다. 그러나 1980년대에는 하겐-다즈와 맞설 새로운 고급 아이스크림 브랜드도 등장했다. 벤&제리스 홈메이드(Ben&Jerry's Homemade)가 그것이다. 이 회사는 설립과정 때문에 널리 알려졌다. 창업자인 벤 코헨(Ben Cohen)과 제리 그린필드(Jerry Greenfield)가 버몬트주의 어느 버려진 주유소에서 이 회사를 설립했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 회사의 제품은 만들어지자마자 바로 하겐-다즈와 경쟁을 벌이게 되었다.
Heinz - 하인즈
헨리 존 하인즈(Henry John Heinz, 1844∼1916)는 피츠버그에서 태어났다. 어린시절부터 사업가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하기도 했던 그는 이미 여덟 살에 집에서 가꾼 야채를 시장에 내다 팔기 시작했다. 이러한 사업기질이 나중에 하나의 왕국을 성장시키는 기조가 되었던 것이다. 1876년 그는 F&J 하인즈사를 만들어 자신이 매니저 자리에 올랐다. 이 새로운 식품회사는 피클과 조미료를 만들어 냈는데, 첫제품이 토마토 케첩이었다.
헨리 하인즈는 자신만만했다. 그는 낙천적인 표정으로 "세계가 곧 우리시장"이라는 호언을 서슴치 않았다. 1900년경 하인즈사는 200종의 식품을 전세계에 두루 판매하기에 이르렀는데 그때 하인즈 세일즈의 슬로건이 "사람이 사는 대륙은 빠짐없이"였을 정도다.
1888년 이 회사는 HJ하인즈로 명칭을 바꾸었다. 뒤이어 1892년에는 회사의 슬로건을 정하기로 했는데, 하인즈는 회사가 판매하는 식품의 다양성을 드러내기 위해 "각양각색의 57개 품목"을 생각해냈다. 하인즈는 마케팅에 관한 한 천부적인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헨리하인즈의 사업은 아들 하워드에 이어, 손자인 잭하인즈가 경영권을 물려받다가 1965년에야 비로소 전문 경영인인 R.버트구킨(R.Burt Gookin)이 경영을 맡게 되었다. 현재 하인즈의 CEO는 1998년 제6대로 취임한 윌리엄R.존슨(William R.Johnson)인데, 그는 V5V라는 성공 방정식을 주창하고 있다. 그는 "5V를 통해 하인즈가 성공을 거둘 것"이라고 주장한다. 5V란 "세계적 범위의 경영과 성장을 바탕으로 하는 비전(vision), 성공을 거두려는 열성적인(voracious)욕구, 주주의 자산가치(value)증시에 대한 집중적인 노력, 코스트 억제로 가속화시킬 대표적인 성장(volume growth)에 전력투구, 개혁의 고속(high velocity)추진"을 말한다.
현재 하인즈의 주식의 시가총액은 185억 달러에 이르고, 종업원은 4만명이다. 그리고 200여 국가에서 5천여종의 제품을 판매하고 있다.
Kellogg's - 켈로그
켈로그 로고는 다른 어느 브랜드보다도 아침 식탁에서 자주 접할 수 있다. 켈로그는 이미 수십년 동안 아침 식사용 시리얼(careals)시장을 장악하고 있고, 또 콘플레이크와 라이스 크리스피 등을 포함한 세계 최고의 시리얼 브랜드를 12개나 소유하고 있다.
1876년 존하비 켈로그(John harvey Kellogg)박사는 미시건 주 배틀크릭에 있는 웨스턴 건강개조협회의 의료책임자로 임명되었다. 이 이관은 어느 목사 부인의 아이디어로 설립된 것인데, 그녀는 곡물과 견과루, 채소를 중심으로 한 식사를 할 경우 정신이 맑아지는 효과가 있다고 믿었다. 켈로그 박사 역시 기름기가 많은 종래의 식품보다는 소화가 잘되는 아침식사용 제품을 개발하면 건강에 좋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에 따라 윌리엄 키이스 켈로그와 함께 얇게 썰어 구은 몰트 맛을 내는 플레이크를 만들어 냈는데, 이 식품은 환자들에게 대단한 인기를 끌었다. 콘플레이크라는 아침 식사용 제품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1906년 윌리엄은 목제창고에 배틀크릭 토스티드 콘플레이크(BattleCreek Toasted Corn Flake Company)라는 회사를 설립하였으나, 1년 뒤 화재로 인해 전소되면서 더 큰 건물을 신축하게 되었다.
1940년대에는 건강에 대한 관심이 높아가면서 건강을 노린 마케팅 효과가 점차 커졌다. 여기에 착안한 켈로그는 영양제와 비타민을 제품속에 넣기 시작했고. 1955년에는 단백질을 함유시킨 시리얼 '스페셜K'를 내놓았다. 날이갈수록 켈로그의 제품은 다양해졌다. 그러나 가장 많이 팔리는 제품은 역시 콘플레이크였다. 1986년 켈로그는 17개국에 22개의 공장을 운용하면서 한 해 60억 달러 이상의 매출을 기록했다. 그러나 최근들어 켈로그는 브랜드 관리방식과 관련해 적잖은 비판을 받았다. <포춘>지는 1997년 8월호에서 "스냅과 크래클, 팝은 어디로 갔는가?"라고 물었다. 이 기사는 "창의력이 부족한 켈로그의 경영진이 세계 톱브랜드 몇 개를 서서히 죽여가고 있다"고 지적했다. 켈로그는 대단한 잠재력을 지닌 뛰어난 기업으로서, 질레트나 프록터&갭블, 안호이저-부쉬와 같은 대기업들이 당면했던 문제들, 즉 유명브랜드의 인지도를 극대화시키고 또 높은 가격을 매기지 않으면서도 프리미엄 이미지를 그대로 유지해야 하는 문제들을 놓고 한참 씨름하고 있다.
McDonald's - 맥도널드
맥도널드 집안의 두 아들-딕과 모리스-은 1940년 캘리포니아 산버너디노에서 레스토랑을 개업했다. 이 식당은 별 다른 특색이 없는 평범한 레스토랑이었다. 바베큐 요리가 나오는 드라이브인 식당이었다. 얼마간의 경험이 쌓이면서 이들은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즉 손님들은 음식이 빨리 나왔으면 하고 바란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두형제는 1948년 12월에 패스트 푸드쪽으로 메뉴를 바꾸었다. 그리고 새로 개장한 레스토랑의 지붕위에는 큼지막한 사인을 붙였다. 속성요리를 내놓는 요리사가 이곳에서 일한다는 내용이었다.
신장개업한 이 레스토랑도 별로 세련된 곳은 못되었다. 딕은 두 개의 아취모양으로 "M"자를 표시하고 벽에는 붉은색과 흰색의 타일을 붙여 닦아내기 쉽게 만들었다. 손님은 차를 몰고 들어오다가 첫 번째 윈도에서 주문을 하는데, 메뉴는 대단치 않아도 두 번째 윈도에 이를때면 이미 주문한 식사가 나왔다. 손님들은 이러한 신속성을 크게 반겼다. 더구나 값도 싸고, 먹기도 쉬웠다. 햄버거는 한 개에 15센트, 음료는 20센트, 프라이 한봉지는 10센트였다.
손님이 구름처럼 몰려들자 맥도널드 형제는 레스토랑을 확장해 나갔다. 결국 이들은 같은 형태의 레스토랑을 여덟 개로 늘렸다. 레이크록(Ray Kroc, 1902∼1984)은 이들의 성공에 주목했다. 1954년, 크록은 맥도널드의 미국독점 판매권을 270만달러에 매입했다. 다시 1961년에는 전세계 독점 판매권을 사들였다. 그에따라 맥도널드 형제는 브랜드명으로만 남았고, 크록이 맥도널드 왕국을 지배하게 되었다.
크록의 경영방식은 역동성과 소박한 경영이념을 결합한 것이었다. 가령 이런 식이었다. "끈기와 굳은 결심만 있으면 못할 것이 없다.", "기업의 두 임원이 똑같은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다면 그 중 하나는 불필요한 사람이다". 이런 경영방식이 주효해 맥도널드는 1959년 100번재 레스토랑을 개점했고, 1967년에는 해외에 첫 레스토랑을 오픈했다. 그리고 1990년 마지막 남은 러시아의 모스코바까지 파고들어 맥도널드 점이 문을 열게 되었다. 슈퍼마켓에서도 필요한 물건을 거의 살 수 없었던 러시아인들은 모스코바에서 활동하는 모든 외국인이 맥도널드에서 식사하는 것을 지켜보고 자본주의의 효율성에 감탄할 수 밖에 없었다. 맥도널드 체인의 아홉번째 레스토랑-크록이 인수한 후 처음으로 개점한 레스토랑-은 일리노이 데스플레인즈에서 개점되었다.
오늘날 맥도널드는 전세계 114개국에서 모두 2만 4,500개의 레스토랑을 운영하고 있다. 그리고 매일 무려 3,800만명이 맥도널드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고 있다.
A.Testony - 아 테스토니
아.테스토니(A.Testoni)는 1929년 구두기능공의 후손인 아메데오 테스토니 (Amedeo Testoni)가 이태리의 볼로냐에서 그의 아내와 4명의 장인과 함께 시작한 작은 구두공방이 시초이다.
이태리 중부에 위치하는 볼로냐는 교통의 요지로서 가죽제품의 본고장이며 숙련된 장인들이 모여 양질의 가죽제품을 생산 해내는 곳으로 유명하다. 이미 13세기 초부터 최고급 구두로 유명해져서 이태리의 귀족과 부호들이 앞다투어 볼로냐산 구두와 피혁제품을 착용하기 시작하였다.
600년 전통의 볼로냐 구두 제작공법을 전수한 구두장인 아메데오 테스토니는 1929년 본인의 이름을 사용한 제품을 생산해 내기 시작했다. 창업 초기인 당시에는 하루 4족만의 소량 생산에 그쳤으나 테스토니 구두는 수제화로서 독특한 기법에 의해 만들어진 편안한 구두로서 단시간 내에 명성을 얻을 수 있었다. 이어 제2차 세계대전을 전후하여 구두의 수요가 급격히 증가하기 시작하자 테스토니사도 생산라인을 확충함과 동시에 신사화에서 숙녀화까지 그리고 핸드백, 여행용백, 벨트, 지갑, 넥타이까지 확대시켰다. 이 시기에 Amedeo의 외동딸 Marisa가 테스토니사의 스타일리스트로서 활약하기 시작하였고 평소 구두 디자인에 관심이 많았던 Marisa가 테스토니의 디자인 기획부에서 근무하는 동안 품질 뿐 만이 아니라 구두 디자인에서도 강렬한 주목을 받게 되었다.
그 후 Marisa는 볼로냐의 오래된 피혁업체 출신 후손인 Enzo Fini와 결혼을 하였고 Fini 부부는 독특한 테스토니만의 구두제조 기법을 계승 발전시켜 나갔다. Enzo Fini는 구두장인으로서 보다는 피혁의 가공 및 영업적인 면에서 수완을 발휘하여 구두 이외에 여성용 핸드백, 여행용백, 남성용 브리프 및 수트 케이스 등으로 품목을 다양화 하여 가죽제품 패션 브랜드로서 성공을 거두도록 하는 한편, 테스토니사의 세일즈 매니저로서 그 후 현대적인 사업구조의 경영기법과 능률적인 생산기법을 도입하였고, 판매가 증가함에 따라 세계 전역에 걸쳐 테스토니 부띠끄를 탄생시키기 시작했다.
Amedeo의 손자이며 3대 회장인 Carlo Fini가 경영을 맡은 이후로 테스토니는 유럽, 미국뿐만 아니라 아시아, 러시아, 중동에 까지 확장되었으며, 테스토니 상표는 독특하고 우아한 모양의 악세사리가 최고의 가죽과 결합한 최고급 제품으로 인정 받게 되었다.
Carlo는 경영에 참여하면서 개혁을 단행하였는데 그의 신경영 즉, 품목의 다양화, 판매시장의 다변화로 패션에 민감한 세계의 고객들에게 테스토니는 더욱 더 필요한 품목이 되었다. 또 단일 브랜드 부띠끄를 설립, 운영하면서 한국을 비롯하여 뉴욕에서 동경까지 회사를 설립하는가 하면 90년대 초에서 순록가죽의 핸드백, 구두, 지갑 및 벨트의 디나미코 라인의 생산에 착수하여 미래지향적이면서도 전통을 그대로 살린 엘레건트한 분위기를 연출하여 구매층의 폭을 넓히는 반면, 튼튼한 소재의 사용으로 소비자들의 호감을 얻을 수 있었다.
대부분의 구두를 수제화로 만들고 있는 테스토니는 지금도 보통 10년 이상의 경험을 가지고 있는 300 여명의 장인들이 제품 하나 하나를 수공으로 완벽하게 생산해 내고 있으며, 고객들에게 최대로 편한 최고의 제품을 선보이는 것을 신조로 하고 있다.
Black & White - 블랙 앤 화이트
귀여운 검정, 하얀 복슬 강아지 2마리가 캐릭터인 블랙 앤 화이트는 우리에게 매우 친숙한 골프웨어 브랜드이다. 1987년 영국의 위스키사와 일본의 3대 종합상사인 미쓰이 상사의 합작을 통해 탄생한 블랙 앤 화이트는 최고급 첨단 소재를 사용해 기능성을 갖춘 패션 골프 웨어로 최고의 고품격 골프웨어를 지향한다. 블랙 앤 화이트는 특유의 캐릭터로 브랜드 이미지가 강력하게 표현되어 있으면서도 심플하고 바지나 스커트의 칼라매치가 용이해 누구나 세련된 감각을 즐길 수 있다.
Burberry - 버버리
버버리 브랜드의 창시자인 Thomas Burberry는 원래 포목상으로 당시 농부나 목동들이 즐겨 입었던 스목-프록이라는 옷감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소재 개발과 연구를 거듭하여 개버딘이라는 혁신적인 원단 개발에 성공한다.
이 소재는 여름에 시원하고 겨울에 따뜻하며 입고 난 후에 세탁하기가 수월하고 비교적 습기의 영향을 덜 받기 때문에, 비가 자주 오고 축축한 영국 기후에 적합한 레인코트로 제작되었다.
우수한 품질과 실용성을 지닌 개버딘은 영국국왕 에드워드 7세에 의해 많은 사랑을 받으며 명품으로 알려지게 되었고, 그가 토마스 버버리의 개버딘 코트를 입을 때 마다 입버릇처럼 "내 버버리를 가져오게"라고 말한 것이 널리 퍼져, 오늘날 버버리라는 패션 용어를 만들어내면서 트렌치 코트의 대명사로 자리잡게 되었다. 이 트렌치 코트는 1차 세계대전이후 일반화 되었고, '카사블랑카'의 험프리 보가트와 잉그리드 버그만이 입으면서 더욱 널리 사랑 받게 된다. 또한 영국 왕실 엘리자베스 여왕과 찰스 황태자, 미국의 조지 부시, 로날드 레이건, '티파니에서 아침을'의 오드리 햅번 역시 버버리 애호가들로 유명하다.
Cartier - 까르띠에
까르띠에 보석과 시계로 유명한 까르띠에는 15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세계적인 브랜드로 그 역사는 1847년 아돌프 피카드의 견습생이었던 루이 프랑소와 까르띠에가 파리의 몽토르고이가 31번지의 보석 작업장의 책임을 맡으면서 시작된다.
1859년 까르띠에는 황제의 사촌이었던 마틸드 공주의 후원으로 사업을 옮기면서 위제니 황후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마침내 1899년 우아함과 고급스러움의 중심이었던 귀 드라빼 13번지로 옮기면서 보석의 명가 '까르띠에' 명성은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왕가와 유명인사들에 의해 특별한 지지를 받고 분별력 있는 대중의 사랑을 받는 '왕들의 보석가'인 까르띠에는 현재 전 세계 180개 부티크, 1만 2,000여개 샵을 가진 거대한 전 세계적인 브랜드로 발전했다.
루이 프랑소와 까르띠에는 여행, 사람들과의 만남, 그리고 독서를 통해 얻은 영감 등에서 상상력의 소재를 찾았다. 즉흥적으로 떠오르는 아이디어를 기록하기 위해 펜과 노트를 늘상 지니고 다녔으며 평범함에서 찾아낸 그의 번득이는 아이디어들은 노트와 스케치북에 기록되어 마침내 보석 영역을 예술장르로 승화시켰다.
이러한 노력으로 까르띠에는 일찍이 영국의 에드워드 7세로부터 '보석상중의 왕'이라는 칭송을 받을 정도로 보석상으로서의 명성을 높여 갔다.
까르띠에의 대표 상품은 3색 보석과 탱크 시계, 가죽제품, 펜, 라이터, 안경 등으로 정교하고 다양하고 아름다운 보석과 시계들. 그중 가장 대표적인 명품인 '탱크시계'는 1917년 제2차 세계 대전때 등장한 르노 탱크에서 영감을 얻어 루이 까르띠에가 고안한 디자인이다.
탱크의 무한 궤도를 연상시키는 프레임과 탱크의 사각 몸체를 표현한 시계 케이스, 문자판은 탱크 프랑세즈, 탱크 아메리카, 그리고 사각의 탱크 반지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새로운 스타일로 변모해 왔다. 탱크 시계는 지금도 전 세계 유명인사와 애호가들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는 최고의 명품 시계다.
Castel Bajac - 까스텔 바작
현대 패션의 위대한 디자이너들은 져지류의 셔츠와 슬랙스, 니트웨어에서 독특한 영감을 얻어 편안하고 활동적인 스타일의 스포츠 웨어를 창조한다. 패션계의 아티스트이자 반패션주의자로 유명한 독특한 감성의 프랑스 패션 디자이너 쟝 샤를르 드 까스텔 바작 또한 시대적 조류에 맞춰 그의 스포츠 웨어라인을 일본 RAIKA사와 라인센스로 1987년 일본에서 처음 런칭하게 되었다
피케이 셔츠로 대변되는 실용적인 골프웨어가 미국 골프웨어 시장을 지배하고 있다면, 사교적인 비지니스에서 출발한 일본 골프시장은 디자이너 캐릭터 등 고가의 고급 브랜드들이 골프웨어 시장을 리드하고 있다. 이러한 고가의 고급 브랜드 중에서 그 특유의 감성과 컬러로 까다로운 일본 골퍼들에게 크게 어필되어 놀라운 신장세를 보이고 있는 골프웨어 브랜드가 바로 까스텔바작 스포츠이다.
Chanel - 샤넬
가까운 사람들에게 '코코'라는 애칭으로 불리던 가브리엘 샤넬은 자신의 말처럼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스타일을 창조해냈다. 샤넬라인(무릎 바로 아래 길이의 치마선), 트위드 재킷처럼 샤넬이 창조해 낸 스타일은 이미 일반적인 패션용어로 자리잡고 있다.
1883년 프랑스 소뮈르에서 가난한 행상인의 딸로 태어난 가브리엘 샤넬은 모자상을 시작으로 패션업에 본격적으로 뛰어 들었다. 코코 샤넬은 그때까지만 해도 남성의 속옷으로만 쓰던 저지를 이용해 편안하고 실용적인 여성의 겉옷을 디자인함으로써 코르셋과 거추장스러운 패티코트로부터 여성을 해방시켰다. 이것은 20세기 모던 패션의 시작이었고 의복의 역사에서 "혁명"과도 같은 것으로 평가된다.
샤넬은 시대를 앞서가는 대담성과 정확한 판단력으로 현대적 의미의 의복을 창조했으며 여성의 개성을 강조하였다. 그녀는 당시의 관습을 타파하고 자유와 활동성을 추구하는 여성을 위한 옷을 만들어냈다. 통이 넓은 바지, 짧은 검정색 원피스 드레스, 긴 외투, 남성용 재킷 등 단순하고 실용적이며 또한 편안하면서도 우아함을 잃지 않는 제품을 내놓았던 것이다. 이러한 의상들은 하나의 스타일로 남아 오늘날까지 살아 있는 샤넬의 특유의 클래식한 패션 세계을 확립했다. 한마디로 샤넬의 의상은 패션의 차원을 넘어선 현대 여성의 라이프 스타일을 표현해 주는 요소라고 할 수 있다. 의복의 역사에 혁신을 일으킨 샤넬은 또한 액세서리와 보석을 디자인하여 패셔너블한 여성을 더욱 돋보이게 하였는데 미국의 보그紙는 샤넬이 의상에서 액세서리까지 망라한 이 모든 작업을 "토탈 룩"이라고 표현했다. 이때부터 토탈 패션이라는 개념이 생겨났다
샤넬은 샤넬의 상징이기도 한 금 체인의 누비 핸드백, 검정 토우 베이지 샌달, 다리를 더욱 더 날씬하게 보이게 하는 샤넬 라인의 창조 등을 통한 토탈룩을 실현해냈다. 샤넬의 토탈룩은 무엇보다 여성을 위한 실용성을 부여하려는 노력이 깃들어 있다.
즉, 여성의 손을 해방시키기 위해 금 체인이 달린 핸드백을 창조해 냈고, 여성의 다리를 더 길어 보이게 하기 위해 베이지색을 이용한 슈즈를 고안해냈으며 포켓은 손을 넣기 위해서 실용성을 바탕으로 디자인되었다.
Dunlop - 던롭
던롭 골프웨어는 한 제품 한 제품마다 그 기능성을 부여하여 최상의 컨디션으로 골프를 즐길 수 있도록 디자인하여 세계 탑 골퍼들에게 어필하고 있다.
클래식하면서 활동적인 디자인과 색상으로 특히, 그린에서 연광에 더욱 돋보이는 색상들로 화려하지는 않지만 고급스러운 것이 던롭 골프웨어의 미덕이다. 영국풍의 정통 골프웨어인 던롭은 프로정신이 있는 플레이 지향의 골퍼들의 욕구에 최대한의 만족을 주기 위해 110년전 영국에서 탄생했다. 1995년 5월 전설적인 브랜드 '던디 라인온'을 거쳐 22세에 독립한 미에꼬 우에사꼬가 런칭한 골프웨어 브랜드가 '미에꼬 우에사꼬 스포츠'이다. 미에꼬 우에사꼬는 1995년에 런칭해 짧은 브랜드 역사에도 불구하고, 우에사꼬 벅스 라는 독특한 캐릭터로 이미 많이 알려져 있다. 이는 이창훈, 이덕화 등 배우들의 의상협찬을 통한 스타 마케팅 덕분이기도 하다. 미에꼬 우에사꼬는 브랜드의 개성을 한눈에 드러내 주는 귀여운 캐릭터를 갖고 있는데 이 캐릭터의 본명은 우에사꼬 벅스, 애칭은 뮤(MU)인 아메리칸 코카스 퍼니엘種 강아지다. 위로 솟은 커다란 귀, 동그랗고 친근한 눈 등 귀여운 외모의 뮤는 티셔츠, 바지, 골프백 등 어느 제품에서나 볼 수 있는 미에꼬 우에사꼬의 상징이다. 30~40대 여성 골퍼들이 즐겨 찾는 미에꼬 우에사꼬는 스포츠와 레저의 라이프 스타일을 리드하는 여성들에게 독특한 컬러와 디자인의 골프웨어로 새로운 문화를 창조해 나가고 있다.
Eizabeth Arden - 엘리자 베스 아덴
캐나다 토론토 출신인 플로렌스 나이팅게일 그라함은 1908년 뉴욕에 도착한 후 뷰티 트리트먼트와 화장품 개발에 몰두하였다. 2년뒤 그녀는 자신의 이름을 '엘리자베스 아덴’으로 바꾸고 6천달러의 대출금으로 뉴욕의 5번가에 첫번째 뷰티 살롱을 오픈하면서 전세계 미용계의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게 되었다. 그의 부티 살롱은 개인의 특성에 어울리는 과학적인 방법이 조화된 최상의 서비스를 제공하면서 부와 사회적 지위를 가진 여성들에게 고급스러움과 화려함을 갖춘 명소로 자리잡게 된다.
5년뒤 고급 빌딩으로 자리를 옮기고 '레드도어’라고 명칭된 아덴의 뷰티 살롱은 미국 전역과 전 세계의 패션과 미의 메카로서 자리 매김하게 된다. 아덴은 살롱의 고객들에게 화장을 널리 퍼지게 하였다. 또한 약용기능을 추가하고 요가를 도입한 체조로 전신미용 즉, 토탈 뷰티(피트니스)개념을 제창하기도 하였다.
젊은 시절 수습 간호사 교육을 받은 아덴은 실질적으로 피부를 개선해주는 스킨케어 프로그램 개발을 꿈꾸었다고 한다. 모든 크림이 끈적이고 무거운 감촉을 주던 당시, 아덴은 최초로 가볍고 부드러운 느낌의 베네티안 크림 '아모레타’를 소개 하였다.
젊은 화학사의 도움을 받아 아덴은 스킨 트리트먼트의 기초인 크렌징 크림과 스킨로션을 개발하고 남성들을 위한 최초의 남성전용 스킨 케어를 개발. 오늘날까지도 메이크업 아티스트와 뷰티 에디터들에게 사랑받고 있는 베스트셀러 아이템 ‘에잇 아워 크림’을 개발하였다.
당시의 화장품은 여배우나 특수한 직업에 종사하는 여성들만이 사용하는 저급한 것으로 인식 되었으나 1930년에 이르러 아덴은 눈화장은 머리카락이나 눈동자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의상에 맞추어야 한다는 새로운 개념을 알리고 분위기에 어울리는 눈화장, 입술, 볼, 손톱에 이르기까지 "토털 룩”의 개념을 소개하였다.
또, 아름다운 잔디와 화려하게 가꾸어진 정원 속에서 골동품과 예술품으로 꾸며진 실내에서 맛사지와 온천을 즐길 수 있는 미국 최초의 최고 스파(SPA)를 오픈하였다.
2차 세계 대전 후에는 사회활동을 하는 여성들이 늘어남에 따라 사회활동을 위한 옷차림과 메이크업을 소개하고 군에 복무하는 여성을 위해 유니폼의 빨간 색과 어울리는 붉은 립스틱을 개발하였다. 그밖에도 세계 최초로 브라운 톤의 립스틱, 광천수를 함유한 립스틱, SPF와 세라마이드를 함유한 스킨케어와 메이크업제품 개발, 매장에서 컴퓨터를 이용한 피부측정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상품의 개발과 소개는 81세로 아덴 여사가 세상을 떠난 이후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다.
제품에 대한 포장, 프로모션계획, 신제품 개발에도 탁월한 재능을 가진 그녀는 마케팅의 선두 주자로서 자신의 이름을 스킨케어 제품에 담아서 광고에 사용하기도 하였다. 1920년에 이르러 108종에 이르는 제품이 595가지의 크기와 모양으로 엘리자베스 아덴이라는 이름을 내걸만큼 언제나 활동이고 의욕적이였다.
80세를 지나서도 젊음과 아름다움을 고집했던 아덴은 미에 대한 집착이야말로 엘리자베스 아덴 화장품의 성공 비밀이다. 현대적이면서 우아한 이미지를 추가하는 여성을 위해 모든 여성에게 고품격의 스타일과 조화로운 아름다움을 전하는 엘리자베스 아덴은 오늘날 세계적인 유니레버 프레스티지 퍼스널 프로덕트의 일부로서 엘리자베스 아덴은 세기 스킨케어의 리더로서의 위치를 위하여 끊임없는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
Etro - 에트로
독특한 컬러와 에트로만의 페이즐리 패턴, 최고급 천연 소재를 사용한 가방과 액세서리, 그리고 이후에 확대된 홈 컬렉션과 의류에 이르기까지 수공예 생산 방식으로 클래식한 여성의 섬세한 감성을 아름답게 표현해 아시아 여성들의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브랜드.
신비로운 컬러와 다양한 문양으로 유명한 이태리 명품 에트로는 1968년 짐모 에트로가 시작한 독창적인 원단 사업을 기반으로 하여 전통적인 모티브를 활용, 고품질의 심미스러움을 갖춘 토털 패션으로 거듭나고 있다. 캐시미어와 실크, 린넨, 면 등의 고급 천연 소재를 사용해 만들어진 페이즐리 문양은 남성, 여성용 의류와 소품부터 각종 가죽 제품에 적용되어 독창적인 에트로만의 스타일을 구축하면서 오늘날 꾸준한 인기를 모으고 있다. 또한 전세계의 주요 도시에 부티크를 추가로 오픈하는 등 국제적인 브랜드 파워를 갖게 되었다. 이번 S/S 컬렉션에서는 의류는 기호적 상징이라는 개념 하에 에트로 특유의 페이즐리 문양 위에 아름다운 자수를 놓아 고급스러움과 화려함이 돋보이는 백을 선보이는 등 매 시즌마다 동양적인 미를 물씬 풍기는 디자인을 제안하고 있다.
*페이즐리 문양
어느 브랜드에서도 모방할 수 없는 에트로를 상징하는 무늬로, 1981년 첫 Collection에서 페이즐리 문양을 선보인 이후 에트로의 트레이드 마크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지금까지 에트로가 사랑받는 이유는 페이즐리 문양을 현대 감각에 맞게 다양한 디자인과 컬러로 표현하기 때문이다.
*페가수스 ETRO 로고
표기와 함께인 페가수스 장식은 에트로의 상징. 헤어밴드나 헤어링, 헤어핀 등 액세서리에 많이 사용되어 고급스러움을 돋보이게 한다.
*E 로고
ETRO의 이니셜인 'E'자를 독특하게 디자인해 지갑이나 가방, 헤어핀 등에 에트로임을 상징해주는 로고로 사용하고 있다.
*스팽글
검은색 시스루 블라우스 위에 수놓아진 스팽글 (금속 등으로 만들어진 얇고 작은 조각의 액세서리) 선들이 아름다운 색채와 광택을 뽐내면서 섹시한 듯하면서도 조숙한 여인미를 풍미한다.
*ETROGRAPHY
새롭게 태어난 꽃 문양이 하얀색의 기모노 라인에 화려한 색감으로 엠보 처리된 드레스. 붉은 색 계통의 스카프가 화려함을 더한다.
*Black line
굵기의 변화를 준 검정 라인의 흰색 스커트는 컬렉션 개념(의류는 기호적 상징)에 맞게 개인의 신분을 기호적으로 상징하는 크레디트 카드의 마그네틱 선을 형상화하고 있다. 단, 스커트에서 느껴지는 딱딱함을 이국적인 문양을 도입한 탑의 화려함으로 보완했다.
*패치워크 (Patchwork)
여러가지 색상과 무늬, 소재의 작은 천 조각을 서로 꿰매 붙이는 패치워크. 흰색 스커트 위에 검정, 브라운의 패턴이 새롭게 추가되어 동양적인 신비로움을 느끼게 한다.
*페이즐리
문양 실루엣을 살려주는 비대칭의 블라우스와 큼직한 페이즐리 문양의 스커트, 허리를 강조한 가는 가죽 벨트로 이국적인 느낌을 더한다. 또한 달리는 슈즈의 형상을 본따 만들어진 'Footbag'는 미끄럼 방지 바닥으로 한쪽 면에 E로고를 보여 주어 실용적인 면과 기능적인 면을 골고루 갖추었다.
Givenchy - 지방시
귀족적인 우아함과 청순함. 만인의 연인인 '오드리 햅번’이 사랑한 '지방시', 영화 '사브리나’에서 오드리 햅번의 검정색 꽃무늬 자수가 놓여진 흰색 스트랩리스 드레스, 일명 '사브리나 팬츠’라고 불리는 시가렛 팬츠, '티파니에서 아침을’에서 선보인 검정 드레스 등을 통해 오드리 햅번은 우아함과 세련된 패션 스타일을 연출 하는 연기자였다. 그러나 그녀의 패션 스타일은 '지방시’가 없이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였다.
지방시의 스타일. 즉,타인과 구별되는 매력, 최상의 우아함, 신중함에 순수함과 고급스러움의 조화는 모나코 왕가의 왕족들과 재클린 케네디 등에 의해 대표되어 왔다.
프랑스의 귀족 출신 위베르 드 지방시(Hubert de Givenchy)는 1952년 파리의 조르주 5세 거리에 그의 패션 하우스를 개업하고 1956년 기성복인 프레 타 포르테를 시중에 내놓은 오뜨 쿠튀르업계 최초의 디자이너가 되었다. 그것이 바로 '지방쉬 위니베르시테’였다.
1957년에는 지방시 향수 회사를 창설했고, 최초의 여성용 향수 '드(De)’와 지방시 작품을 위한 최고의 사절 오드리 햅번을 위한 '렝떼르디(L`interdit)’를 출시하였다. 1958년에는 사상 처음으로 여자들의 무릎이 드러나는 치마 길이의 디자인을 발표하여 주목을 받았다.
1995년 지방시가 은퇴하자 그 해에 영국 디자이너상을 3번이나 탔던 신예 디자이너 존 갈리아노가 지방시 오뜨 쿠튀르 라인의 디자이너로 지명되었다가 크리스챤 디올의 수석디자이너로 자리를 옮긴 후 1996년 알렉산더 맥퀸이 지방시의 오뜨 쿠튀르 라인과 기성복라인을 총괄하게 되었다.
세계적인 패션하우스로 자리잡은 지방시는 알렉산더 맥퀸에 의해 재창조 되어지고 있다. 영국 빈민가 출신으로 런던 세인트 마틴 아트 스쿨을 졸업한 후 16세부터 영국 의류산업 지역의 중심부인 Savile Row 에서 패턴사로 경력을 쌓기 시작. 20세에는 일본 디자이너 Koji Tatsuno 와 이태리 디자이너 Romeo Gigdli 밑에서 일을 하였다. 전형적인 자수성가형인 알렉산더 맥퀸은 영국 디자이너로서의 핸디캡을 딛고 일어나 패션계를 선도하는 신세대 디자이너로서 지방시 기존의 고전적이고 우아한 분위기를 벗어나 새롭고 창조적인 이미지를 이끌어 나가고 있다.
Hermes - 에르메스
가죽을 다루는 장인정신이 에르메스의 뿌리임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1837년, 에르메스사의 창업자인 티에리 에르메스(Thierry Hermes)는 파리에서 안장과 마구 용품 사업을 시작함으로써 세계적인 브랜드가 탄생하게 되었다. 아버지로부터 전통의 프랑스식 장인정신을 이어 받은 그의 아들은 1879년 가족과 함께 지금의 그 유명한 포브룩 쌩또노레 24번가(24, Faubourg Saint Honore) 로 매장을 옮긴 후 안장을 중심으로 하는 마구 제조업으로 사업을 확대시켰다.
그는 탁월한 솜씨로 품질을 인정받았으며 곧 전세계의 왕실과 귀족들에게 안장과 마구용품을 납품할 정도로 명성을 얻었다. 자동차의 출현으로 1918년, 티에리 에르메스의 손자인 에밀 에르메스(Emile Hermes)는 교통문화의 변화에 따른 새로운 생활양식을 구상하게 되었다. 그는 안장을 만들 때 사용되는 독특한 박음질법-'새들 스티칭(sadd-le stitching)'-을 그대로 이용한 고품질의 가죽제품과 여행용 가방을 선보였는데, 이것이 곧 에르메스 스타일의 탄생을 의미하는 사건이었다.
이어서 그는 가죽제품 외에 패션, 장신구, 식탁용 은제품, 다이어리 및 실크 스카프에 이르는 다양한 제품들을 내놓게 되었다. 이외에도 에밀 에르메스는 개인컬렉션을 시작, 현재의 포부룩 쌩 또노레 24번지의 상점 내에 에르메스 박물관을 설립하기도 했는데 이곳은 직원들에게 창의적 영감을 불어넣는 근원이 되어 주는 명소이다. 에르메스는 1929년 뉴욕에 첫 부띠끄를 오픈하면서 국제적인 브랜드로 성장하게 되었다. 그후 향수,타이, 맞춤복 및 기성복, 비치 타올, 에나멜 장신구, 그리고 여성 및 남성복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패션분야에 걸쳐 발전을 거듭해 왔다.
에르메스는 서부 유럽, 미국 및 태평양 연안으로 새로운 시장을 개척해 나가 일찌감치 전 세계적인 브랜드가 되었다. 그러나 처음 에르메스를 창업했을 때의 정신은 지금까지도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어떤 대가를 지불하고라도 얻어내는 최고의 품질'바로 이 정신이 에르메스가 150여년전의 이상적인 수작업의 품질을 충실히 지켜오는 바탕이 되었고, 모든 에르메스 제품에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원칙이 되었다..
1978년, 쟝-루이 듀마(Jean-Louis Dumas) 가 그룹의 회장으로 취임한 후, 에르메스는 특히 시계 및 식탁 장식용품과 같은 새로운 라인을 도입해 상품군을 확대하고, 새로운 재료를 혁신적으로 사용하는 등 회사 전체가 새로운 활기를 띠었다. 에르메스는 아시아 및 호주 지역의 국제시장에 새 부띠끄를 열고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고 미국 및 유럽의 기존 부띠끄의 경우도 전 세계적으로 일관된 브랜드 이미지를 심어 줄 수 있도록 지역 매장에서 제품의 유통망과 직접 판매 역할을 함께 하도록 편성, 시장을 강화하였다.
Louis Vuitton - 루이 뷔통
연한 참나무 빛깔의 가구와 베이지의 카펫,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아우르는 조명은 한눈에 150년 전통으로 귀족풍을 대표하는 루이비통 매장임을 알게 해준다. 매장 한켠에는 베이지색과 세련되게 어울리는 붉은 소파가 있어, 고객이 편안하게 제품을 고를 수 있도록 꾸며져 있다. 멋을 아는 이들 가운데 진한 고동색 배경에 반복되는 꽃과 별무늬, 그리고 `LV자'가 겹쳐진 루이비통 모노캔버스 가방을 모르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가장 프랑스적이면서도 가장 보편적인 명품으로 통하는 루이 비통. 150여년 역사가 만들어낸 철저한 귀족성은 보는 이로 하여금 감탄을 금할 수 없게 한다.
브랜드 창시자인 루이비통은 귀족들의 여행 짐꾸러미를 전문적으로 꾸려주는 패커(Packer)로서 그 뛰어난 솜씨를 인정받아 나폴레옹 3세의 부인인 유제니 황후의 총애를 받았다. 마침내 그는 1854년 현재 파리 오페라하우스가 자리잡은 파리시 중심가 루데브데 까푸 신느에 첫 매장을 열고 반원형 뚜껑의 여행용 트렁크를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뚜껑이 편편한 여행용 트렁크를 제작해 일대 혁신을 불러 일으켰다. 루이 비통의 제품은 대단한 인기가 뒤따랐고 모조품이 판을 쳤다. 이 때 처음 고안한 것이 연속적으로 반복되는 빨간줄과 격자무늬의 문양이었다.
이러한 모조품을 막기 위한 노력은 1896년 그의 아들 죠루쥬 비통이 아버지의 이름 첫 글자 "LV자"와 당시 유행하던 아르누보 경향의 꽃과 별 무늬를 결합시켜 그 유명한 모노그램 캔버스를 만들어내 그 전통이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이후 루이비통은 전통을 반영하면서도 혁신을 추구하여 1985년 검정, 빨강, 노랑, 파랑, 초록, 갈색 등의 세련된 원색의 에피라인을, 1993년에는 비지니스맨을 위한 타이가 에피시아 라인을 출범하였다. 1996년 모노그램 캔버스 탄생 100주년을 맞이하여 세계적인 디자이너들이 모노그램 캔버스를 사용한 작품을 서보였고, 모노그램 탄생 직전까지 사용되었던 다미에 체크무늬 캔버스를 부활한 작품을 선보이기도 했다.
루이비통의 제품 라인은 루이비통을 대표하는 L과 V, 그리고 꽃과 별의 무늬가 연속되는 모노그램 라인, 루이비통의 제품에 색을 도입한 에피 라인, 베이지와 진한 고동의 체크무늬의 세련된 다미에 라인, 모노그램 문양을 현대적으로 해석하여 소가죽 위에 특수 코팅처리를 해 반짝거리는 모노그램 베르니 라인 등이 있다. 핸드백 제품 라인외에 루이비통은 디자이너 마크 제이콥스가 디자인한 기성복 및 구두를 판매 중이다. 현재 의류는 프랑스, 영국, 미국, 일본 및 홍콩에서만 판매 중이며 국내에서는 2000년에 판매를 시작할 예정이다.
Maska - 마스카
에덴에서 탈출한 이브의 선택, 슬랙스의 가벼운 흔들림, 손등을 덮는 긴 소매단, 몸의 곡선에 따라 흘러내리는 니트의 부드러운 감촉 등 마스카는 에덴 동산의 이브가 입더라도 거추장스러워하거나 불편해 하지 않을 그런 자연스러움이 배어있다.
1967년 이탈리아의 레지오 에밀라 근교에 코트와 자켓을 생산하는 전문회사로 첫발을 내딛은 마스카는 1991년 첫 부티크를 오픈한 이래 현재 50여 개국 1천5백 개의 매장을 보유할 정도로 놀라운 성장을 거듭했다. 마스카의 미덕은 무엇보다 자연스러움에 있다. 어느 한 군데 각이 지거나 모가 나지 않은 부드러움이 코트, 스카프, 니트 등 전 제품에서 묻어난다. 그래서 반듯한 정장은 아니더라도 격식을 갖춘 자리에서도 그 빛을 잃지 않고, 활동적인 장소에도 잘 어울리는 넉넉함이 있다. 마스카는 여성의 자연미를 바탕으로 스포티한 감각을 더한 디자인으로 개성을 중시하는 현대적인 감각파 커리어 우먼들에게 인기가 높다.
Missoni - 미소니
“색체와 니트의 마술사” 자연에서 얻을 수 있는 화려한 색상의 혼합의 조화로 니트를 예술의 경지에까지 오르게 만든 미소니.
미국 메트로 폴리탄 의상 박물관은 처음 니트를 발표한지 43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신선한 감각과 오묘한 색상의 혼합을 통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미소니 특유의 시대를 초월한 독특한 컬렉션을 소장하고 있다.
1938년 186cm의 오타비오 미소니(Ottavio Missoni)는 이태리 육상 챔피온에 등극하고 비엔나 '세계주니어 선수권 대회’에서 우승하는 등 촉망 받는 육상선수였다.
27세가 되던 1948년 런던올림픽에 400m 허들계주의 최종주자로 참가한 오타비오의 달리는 모습에 반하여 경기가 끝난 후 찾아간 16세의 소녀 로지타를 만나면서 사랑에 빠졌다. 그 후, 5년간의 열애 끝에 1953년 두 사람은 웨딩 마치를 올리고 부부가 되었다. 이들의 결혼은 런던 올림픽의 이탈리아 선수단의 유니폼을 디자인할 정도로 패션에 조예가 깊은 다재다능한 남편 오타비오와 란제리 제조 공장 집 딸인 아내 로리타가 만나는 극적인 결합이라고 할 수 있다.
처음 사업을 시작할 때 미소니 브랜드가 아니라 에마누얼 칸 등에 OEM방식으로 제품을 납품하였다. 그러다 1954년 트라에스터 공장을 정리하고 갈라콰테로 활동 무대을 옮기면서 미소니라는 자신들의 브랜드로서 본격적인 활동을 펼치게 된다.
기하학적이고 추상적인 패턴의 니트가 폭발적인 인기를 얻게 되고 그에 힘입어 1966년 밀라노에서 최초의 미소니 자신의 컬렉션을 열게 된다. 다음 해 피렌체에서 시스루의 이브닝 의상을 발표하여 커다란 유행을 일으키며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미소니는 패션과는 관련이 없는 분야로 인식되던 니트를 평상복에서 야외복까지 레벨 업 시켜 니트를 패션화 하는데 커다란 공헌을 하였다.
미소니 부부는 미소니 브랜드의 니트가 명품으로 자리잡도록 로리타가 직접 디자인을 담당하고 오타비오가 편성, 봉제, 배색을 담당한 긴밀한 공동작업을 거쳐 생산을 한정하였다.
자연이 주는 자유분방함과 감성이 빚어내는 미소니의 컬러들은 환상과 기쁨을 표현한다는 찬사를 얻고 있으며 모방을 불허한다.
미소니의 컬러 팔레트는 40여가지 기본 색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여기에서 10여 가지색을 선택하여 하나의 색 그룹을 만들어낸다. 여러 개의 색상 혼합이 디자인의 토대가 되며 시즌마다 이러한 컬러그룹을 네가지로 설정하여 컬렉션에 선보이고 있다.
전통적인 니트기계를 사용하여 새로운 색의 조화와 색다른 형식의 니트를 탐구한 공로를 인정받아 1973년에는 패션계의 오스카상이라 불리는 '니만 마커스상’을 수상하였고 78년 10월에는 디자이너로서는 드물게 뉴욕 휘트니 박물관에서 열린 전시회를 개최하여 니트를 예술작품관 같다는 평가를 받았다. 미소니 부부는 "ARTISANS” 라는 이미지로 FORK ART의 영향을 받았다. 부부가 일으킨 사업은 두 아들 빌리토리오와 루카스가 판매, 생산과 기술개발을 딸인 안젤라가 패션쇼를 담당하여 2대의 미소니 신화를 창조해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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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nt Blanc - 몽블랑
필기구의 예술퓸 세계가 인정하는 최고의 필기구인 몽블랑의 역사는 독일 함부르크의 문구점 상인 C.J.휘스와 은행가 C.W.라우젠 그리고 베를린의 기술자 W.잔보아 세 사람이 함부르크에 공장을 세워 만년필을 제조하기 시작한 1906년부터 시작된다.
몽블랑의 심벌마크인 6각형의 흰별(white star)은 눈덮인 몽블랑산 봉우리의 정상을 상징하며 그 높이는 해발, 4810m로 유럽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모든 몽블랑 만년필의 펜촉에는 '4810'이라는 숫자가 새겨져 있으며 이 심벌마크는 유럽인이 몽블랑에 자부심을 느낄 수 있을만큼 최고의 만년필을 만들겠다는 신념과 철저한 장인 정신을 그대로 각인해 놓은 것입니다. 몽블랑이 필기구의 예술품으로 인정받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펜촉의 정교함에 있다.
모든 펜촉은 수공으로 만들어지고 150여의 철저하고 엄격한 공정을 거쳐 만들어져 최고의 정밀도를 자랑한다. 또한 펜촉은 가장 이상적인 재료인 '금'으로 되어있다. 고전미를 바탕으로 하면서 현대적인 감각을 잃지 않는 독창적인 디자인, 최고의 소재만을 엄선해 제품의 원료로 사용한다는 점과 기계화에 의한 대량생산이 유행인 현대 산업사회에서 여전히 숙련공의 손에 의한 수작업을 고수한다는 점은 몽블랑만이 지닌 매력이라고 할 수 있다. 1990년대 들어서면서 몽블랑은 종전의 필기구 전문 브랜드에서 새로운 변신을 시도한다. 시계, 지갑, 벨트, 다이어리, 안경, 썬글라스, 액세서리 등의 상품구색이 늘어나면서 추구된 토털 브랜드로의 변화는 이제 성공적으로 정착되었다. 당당한 명품브랜드로서 1906년 설립당시의 정신을 그대로 계승하면서 몽블랑을 사랑하는 고객들에게 더욱 큰 만족을 드리기 위해, 다양하고 완벽한 제품을 만드는 일에 몽블랑은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다.
Rena Lange - 레나 랑에
1916년 독일 뮌헨 Palais Moy에 최초의 Shop을 오픈하면서 시작된 레나랑에는 오늘날 19개의 레나랑에 부티크와 250여개의 전문점을 통해 꾸띄르컬렉션에서부터 1982년 소개된 프렡타 포르테 콜렉션에 이르는 다양한 라인을 선보이고 있다.
레나랑에는 회장이며 남편인 Peter Gunthert와 디자인팀을 이끄는 부인 Renata, 생산관리와 미주지역 마케팅을 총괄하는 아들 Daniel Gunthert 이렇게 한가족이 중심이 되어 운영되고 있다.
수석이자이너로 활동중인 Renate Gunthert는 프랑크푸르트의 살롱에서 견습공으로 시작하여 수석디자이너의 자리에까지 오른 인물로 스스로가 작품의 훌륭한 모델이기도 하다.
레나랑에에서 전개되는 컬렉션들은 모든 상황에 어울리게 입고자 하는 고객을 만족시키기 위해, 커리어 우먼을 위한 컬렉션인 RENA LANGE MAIN LINE,레져 활동을 위한 주말, 활동복을 보여주는 RENA RANGE BLUE, 미래의 레나랑에 세대가 될 잠재고객을 위해 편안한 룩을 전개하는 RENA LANGE RED의 3가지 라이프 스타일의 의류와 함께 구두, 악세서리를 함께 생산하고 있다.
'99레나랑에 F/W 컬렉션은 젊고 신선한 분위기의 여성스러운 Counture Collection 으로 현대적이며 고급스러움을 선보이고 있다.
항상 최상의 품질과 독창적인 디자인을 우선으로 하는RENA LANGE는 현대적 스타일의 끝없는 변화 추구로 다가올 2000년의 패션을 리드할 것이다.
Renoma Sports Club - 레노마
레노마 스포츠 클럽은 성공한 30대를 메인 타겟으로 하는 30대 브랜드다. 레노마 스포츠 클럽은 20대에게는 미래의 이상적인 자화상으로, 40대에게는 잃어버린 젊음과 자심감에 대한 부러움으로 인식되는 브랜드로 고객성향은 스포츠와 레저의 라이프 스타일을 리드하는 중심 세대이며, 자기일에 대한 성취와 지위, 그로부터 나오는 경제력을 가지고 있고, 삶의 여유나 여가를 중요시하며, 자기만의 개성과 멋을 추구할 줄 아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레노마라고 하는 이름은 단지 택이나 라벨의 상표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contemporary style 에 시간을 초월한 패션 콜렉션을 지향하는 것이다.
레노마 가문은 전통적인 양복 제조업에 종사하였는데, 모리스와 미셸은 어릴적부터 의상에 대한 독창적인 생각으로 당시에는 상상하기 어려운 독특한 디자인을 창작하여 주위를 놀라게 했다. 레노마는 젊은이들이 무엇을 요구하는지 간파하는 능력으로 그의 성공을 몰고온 minet style( 영어로는 young and in)으로 이는 마드라스 무명지에 체크 무늬인 아메리칸 재킷을 인용한 스타일)을 고안해 상당기간 미주 틴 에이지 스타일로 대학생의 대유행을 기록했다. 1960년대에 레노마 형제는 왕성한 패션창작으로 남성 패션계에 소용돌이를 일으켰고, 의류 산업의 침체에도 불구하고 129 lue de la pompe 에 첫 부띠끄를 개점하여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 그들은 패셔너블한 고급 이미지 속에서 젊음의 트레이드 마크인 ye-ye look으로 널리 알려진 우아하고 젊음이 넘치는 옷을 만들어 친구들에게 입게했다. 또한 1960년대에는 반짝이는 벨벳을 이용한 블레이저를 디자인해 선풍을 일으켰다. 1970년대에는 세계무대에서 호평을 받기 시작해, 의류와 함께 가죽제품, 액세서리, 향수, 우산, 모자, 시계, 홈패션까지 다양한 상품을 개발했다. 레노마 스포츠 클럽은 디자이너 캐릭터 차원의 감각으로 30대 성공한 남성을 메인타겟으로 하는 브랜드로 리조트와 디자인 캐릭터의 개념을 넘어 골프웨어에서의 감각성과 심플하고 세련된 이미지를 제 창조한 브랜드다. 기존의 골프웨어와 비교할 때 전체 컨셉은 골프 스포츠에 두면서도 before & after 의 개념을 도입하여 리조트와 디자인 캐릭터의 개념을 보완했다. 디자인 컨셉은 simple & clean 이며, 레노마의 black/white/grey 의 모노톤을 기본으로 전개하며, 기존의 골프웨어에는 없는 vivid 한 accent color 군을 도입했다.
S.T Dupont - 듀퐁
에스 티 듀퐁은 약 125년의 전통을 가진 세계적인 명품 브랜드로 오랜 세월동안 명품, 일류품으로서의 위치를 지켜왔다. 오늘날 남성들에게 널리 알려진 듀퐁 라이터의 명성이 그 한 예라고 할 수 있다. 에스 티 듀퐁하면 떠오르는 라이터, 필기구 보다 더 뿌리깊은 제품은 가죽으로 만든 에스 티 듀퐁의 여행용 가방이다.
에스 티 듀퐁의 역사는 시몽 티소 듀퐁(Simon Tissot Dupont)이 25세 되던 해인 1875년 여행용 가죽가방을 만들면서 시작되었다. 듀퐁의 여행용 가죽 가방은 제왕, 군주, 왕자, 대사, 부호들의 기호와 요구를 충족시킴으로서 높아갔고 미국의 대공황 시기에도 에스 티 듀퐁 제품은 오히려 큰 성공을 거두기도 했다.
1948년 에스 티 듀퐁은 에딘버러공과 결혼하는 영국의 엘리자베스 공주를 위하여 마지막 여행용 가방을 만든 후 점점 라이터 사업에 주력하게 되었다. 에스 티 듀퐁이 라이터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2차 대전 무렵이었고 이후 그 명성은 세계적으로 확대되어 완벽한 금은세공술을 가진 장인들을 속속 영입하여 라이타를 예술품의 경지에 올려 놓았다.
60년대 초 처음으로 시도된 라이터 표면의 락카처리는 중국 옻칠 전문가들로부터 그 비밀기법을 완벽하게 전수받아 적용한 것이며, 에스 티 듀퐁은 이 자연산 옻칠기법을 독창적인 기법으로 발전시켜 오늘날까지 그 명성을 유지하는 밑거름으로 삼고 있다.
70년대에 들어 듀퐁은 라이터에 적용해 성공을 거둔 그 완벽한 금은세공기법과 옻칠기법을 필기구에 적용하여 명품 필기구로서의 확고한 위치를 다지는데 성공했다. 그후 가죽제품(가방, 지갑, 벨트), 시계, 안경, 액세서리, 남성복, 넥타이 등의 제품들이 고객의 기호를 충족하기 위해 등장했다. 에스 티 듀퐁은 전통의 계승 유지 발전이라는 차원에서 과거에 누렸던 가죽제품의 명성을 새롭게 재현하려는 강한 움직임을 보여 주고 있다.
최근 남성고객에 초점을 맞춘 가죽제품 콜렉션인 프레갸트(Fregate) 라인은 과거 전통의 잠재력을 현대적 분위기로 재해석, 듀퐁이 심혈을 기울인 제품으로 21세기 활동적인 남성의 필수품으로 예견되는 상품 라인이다.
과거처럼 일부 상류층의 전유물이 아니라 보다 젊고 활동적인 남성들을 위해, 또 남성 전용 브랜드라 하여 거부하는 여성들을 위해 그 첫 시도로 필기구 소브라니(Soubrany) 라인을 탄생시키기도 했다.
시대가 바뀌고 수요층이 바뀌어도 에스 티 듀퐁이 추구하는 정신은 일관되게 유지되어 왔다. 그것은 사람들이 사용하는데 늘 편리해야 하며, 시대가 바뀌어도 변함없는 미적가치를 내포해야 한다는 것이다.
끊임없는 신기함과 즐거움을 주는 미적 요소(예술성)와 늘 생활에 확신과 편리를 주는 요소(실용성), 이 두 요소가 끊임없이 긴장하여 조화를 이룰 때, 그리고 그것을 가능케 할 장인정신이 뒷받침 될 때 명품은 탄생될 것이며, 명품 브랜드로서의 에스 티 듀퐁은 강한 생명력을 가지게 될 것이다.
Salvatore Ferragamo - 살바토레 페레가모
1898년 나폴리에서 1백 킬로미터 떨어진 작은 마을 보니토. 새벽이 동터오는 것도 잊고 동생을 위해 자그마한 흰 구두를 만들던 소년 페라가모와 함께 구두의 역사는 시작되었다.
이탈리아 자연에서 영감을 얻고, 아름다운 선과 색체에 눈을 뜬 페라가모는 최고의 구두를 만드는 일에 모든 것을 걸기로 결심하고 1920년 미국 헐리우드로 건너가 본격적인 수업을 쌓기 시작하였다. 헐리우드 영화에 필요한 다양한 구두를 만들던 페라가모는 카메라 앞에서 시달리는 배우들을 보고 착용감이 뛰어난 구두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구두가 발에 끼치는 문제점을 해결하고 착용감이 좋은 구두를 만들기 위해 페라가모는 20살도 되기 전에 미국 UCLA대학에서 인간 해부학을 공부하면서 사람이 똑바로 서있으면 체중이 약 4Cm정도의 면적에 불과한 발의 중심에 쏠린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대부분의 구두 제작자들이 발의 중심을 불안정한 상태로 방치하고 구두의 뒷굽, 복숭아 뼈 부분을 지탱하는 데에만 신경을 써온 것을 알게 되었다.
이러한 과학적인 연구와 노력의 결과 그의 구두는 당시 유명인들과 상류 계층 사람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게 되었다.
1927년 미국 헐리우드에서 쌓은 경험으로 자신감을 얻은 페라가모는 이탈리아로 돌아와 회사를 설립하였고, 그로부터 30년간 플로렌스 살롱에서 만든 구두들은 날개 돛힌 듯 판매되었다. 살바토레 페라가모의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르네상스 시대에 베니스를 비롯한 이탈리아 각 지영에서 즐겨 신었던 '소피네'에서 영감을 얻은 가볍고 높은 코르크 굽 구두, 새끼 염소 가죽으로 만들어진 샌들과 1947년 구두 제작자로는 처음으로 패션계의 오스크 상으로 불리는 '니먼 마커스'상을 수상한 투명 구두 등이 있다.
니먼 마커스 상을 수상한 '투명 구두'에서 알 수 있듯이 당시로서는 상상할 수 도 없었던 디자인과 소재 등을 구두에 도입하는데 뛰어난 창의력을 발휘했던 페라가모는 2차 세계대전 당시 구두를 만들 재료가 부족해 지자 당시로서는 너무나 보잘 것 없는 소재로 여겨지던 짚이나 코르크 등을 구두의 소재로 사용하여 구두 역사에 새로운 장을 열게 된다.
구두 굽으로 사용되던 쇠봍이나 나무 등이 군수물자로 모두 동원되어 구두굽을 만들 수가 없게 되자 그는 코르크를 도입하여 구두 굽을 만들기 시작하였으며, 이것이 오늘날까지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느 코르크 굽 구두나 플랫폼 슈즈의 시초가 되었다. 또, 가죽이 부족해 지자 짚이나 사탕을 싸던 비닐 종이, 낚싯줄, 퀼트 천 등의 보잘것없는 소재를 사용하여 고급스럽고 새로운 스타일의 구두를 제작하기도 하였는데 이러한 시도를 통해서 당시 "구두의 소재는 가죽"이라는 고정관년을 깨고 구두에 패션 감각을 처음 도입하는 계기가 되었다.
Swatch - 스와치
1979년 어니스트 톰케(Ernest Thomke)의 스와치 개발을 계기로 사실상 휴면상태에 빠져있던 스위스 시계산업이 하루아침에 활기를 되찾았다.
스와치는 스위스 시계산업을 침체시킨 위기상황에서 태어난 브랜드였다. 화려한 색깔의 스와치가 처음 등장한 것은 1983년이었다. 당시 스와치가 내건 광고에서 슬로건으로 내세운 것은 "두번째 집인 별장은 가지면서 왜 두 번째 시계는 갖지 않는가?"라는 것이었다. 여기서 두 번째라는 의미의 "second"를 "s"로 줄여 "s"watch(시계)라고 한 것이 오늘날의 스와치(Swatch)브랜드가 된 것이다.
당시 일본제 시계가 세계시장을 휩쓸면서 스위스는 전통적인 시장인 고급 시계부문에서 밀리기 시작했다.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한 스위스 시계산업이 살아날 가망성은 거의 없었는데 그때 기적이 일어났다. 스와치라는 브랜드의 기적이었다.
스위스의 유력한 시계 제조업체들은 컨소시엄을 만들어 시계산업울 살려내자는데 뜻을 모았다. 스위스에서 가장 유명한 몇몇 업체들이 이런 취지에 뜻을 모았다. ASUAG-SSIH라는 명칭의 컨소시엄은 니콜라스 하이예크(Nicolas Hayek)라는 기업인의 주도로 SMH(the Swiss Corporation for Microelectronics and Watchmaking Industries)란 이름으로 바뀌었다. 나중에 이 명칭은 스와치 그룹으로 다시 바뀌었다.
그러나 성공적인 아이디어를 낸 사람은 어니스트 톰케 사장과 이 회사의 수석 엔지니어인 자크뮐러(Jacques Muller)였다. 톰케는 그 당시 세계에서 가장 얇은 시계인 델리리움을 개발한 인물이기도 했다. 그는 델리리움의 염가제품을 만들어 일본과 맞서 싸우자는 의견을 내놓았다. 그 과정에서 오리지널 스와치의 세부적인 모양과 구성을 내놓았다. 뿐만 아니라 가장 중요한 마케팅 아이디어까지 내놓았다.
하이예크는 ASUAG와 SSIH의 합병으로 스와치 그룹이 출범한 뒤인 1986년에 그룹의 회장겸 CEO로 취임했다. 이 그룹은 스와치 외에도 오메가, 론진, 라도, 미도, 해밀턴, 캘빈클라인 등 여러 브랜드를 지니고 있다.
신기술과 새로운 디자인이 도입되는 속도는 스와치 브랜드의 참신함을 그대로 유지시키는데 핵심적인 구실을 했다. 그 한 예가 플라스틱 스와치에 새로운 변화를 주는 것이었다. 가령 크로노와 아이러니를 포함한 새로운 모델은 플라스틱 대신 금속시계로 되돌아가고 있는데, 이는 모델 이름대로 스와치의 본래 구상과는 어긋나는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그밖에도 다양한 이노베이션이 이뤄지고 있다. 태양열을 이용하는 솔라 스와치나 멜로디로 알람기능을 하는 스와치 뮤지콜, 무선 호출기가 내장된 세계 최초의 시계인 비르(Beep) 스와치 등이 그런 것이다. 또한 전세계 상당수 스키장의 스키패스로 활용되는 액세스 컨트롤 기능이 내장된 액세스 스와치도 참신한 이노베이션의 한예다.
이같은 참신한 아이디어 때문에 스와치는 계속 시계시장에서 선두자리를 고수하고 있다. 1997년 스와치는 30억 스위스 프랑의 수익을 올렸는데, 10대가 선호하는 브랜드로서는 상당한 수입이다.
Gillette - 질레트
질레트는 1901년 보스턴 바닷가에 있는 질레트 안전면도기 회사의 브랜드로 그 모습을 드러냈다. 이 회사를 설립한 사람은 킹 캠프 질레트(King Camp Gillette, 1855∼1932)라는 이름을 가진 인물이었는데, 당시 그는 아직 출하조차 하지 않은 제품을 내세우며 여러 투자가들에게 출자를 권유하고 있었다. 질레트가 안전면도기와 면도날을 생산하기 시작한 것은 그로부터 2년뒤였다. 그러나 모험적 사업의욕이 왕성했던 질레트가 안전면도기 생산에 착안했던 것은 1895년이었다. 질레트는 처음부터 염가시장으로 맹렬하게 파고들 수 있었다. 값싼 1회용 면도기가 잘 팔리자 한동안 이같은 마케팅 방식을 그대로 고수했다. 그러다가 품질이라는 경쟁상의 이점을 재인식 하게 되고, 그 이후 질레트 브랜드는 남녀의 몸단장과 연관된 부문은 물론, 알카라인 배터리를 포함한 다른 여러 부문에서도 풍성한 시장을 만들어냈다. 현재 질레트 왕국에는 브라운(Braun) 전기용품과 화장품 및 화장도구, 문구용품(파커와 페이퍼메이트펜 등이 포함되어 있다), 오랄-B 치약, 1996년에 합병한 배터리 메이커 듀러셀 등이 포진하고 있다. 현재 전세계 12억 이상의 인구가 매일 질레트 용품을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추산된다. 23개국 63개의 생산시설에서 4만 4,000명이 근무하는 질레트는 1997년에 101억 달러의 매출고를 기록했다.
질레트는 시장과 영업활동 면에서 진정한 글로벌 기업이었다. 매출과 이윤의 70%이상이 미국 이외의 지역에서 들어왔다. 로저베드 모스캔터 같은 매니지먼트 이론분야의 권위자도 "모든 기업이 해야할 일을 질레트는 글로벌 차원에서 이뤄내고 있다"고 격찬했다. 앞으로도 계속 최소한의 경쟁상황속에서 영업활동을 할 수 있으리란 기대는 질레트만이 누릴수 있는 특권인 듯 싶다.
Intel - 인텔
1968년 고든무어(Gorden Moore)와 로버트 노이스(Robert Noyce)는 페어차일드 사를 그만둔 뒤 인텔사를 설립했다. 그 후 인텔은 기술발전의 과정에서 그야말로 돌풍과 같은 존재가 되었을 뿐 만 아니라 아울러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이들의 모험에 앤디 그로브(Andy Grove)가 참여했다. 그리고 고든무어는 빈번하게 운외되는 이른바 실리콘 밸리의 법칙, 즉 "무어의 법칙"을 만들어냈다. 무어의 법칙이란 동일한 크기의 칩에 기록할 수 있는 전자적 요소의 숫자가 18개월 마다 배로 증가한다는 것이다.
인텔은 출범 초기부터 이같은 비약적인 기술발전과 향상을 이루어 냈다. 1971년 인텔은 세계 최초의 마이크로프로세서인 4004를 내놓았다. 또 인텔은 DRAM(Dynamic RAM)을 발명해 내기도 했다. 1980년대 들어 인텔은 칩의 제조 권리를 어떤 업체에도 허용하지 않았다. 빈틈없는 조치였다. 결국 모든 칩의 생산이 인텔에 달려있었다. 1981년 인텔의 마이크로프로세서가 장착된 IBM PC가 출시되자 인텔의 매출은 1984년 처음으로 10억 달러를 돌파했다. 1990년에는 분기 매출이 10억 달러를 넘어서는 등 눈부신 성장과정을 거쳤으나 인텔은 그 동안 아무런 브랜드도 없었고 널리 알려지지도 않았다. 인텔은 PC 칩시장의 80%이상을 차지한 뒤에야 비로소 브랜드를 통해 널리 알려져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인텔은 컴퓨터 안에서 진짜 제구실을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모든 사람들이 알기를 바랐다. 그래서 '인텔 인사이드(Intel Inside)' 광고캠페인을 벌이게 되었다. 이같은 광고활동에는 엄청난 비용이 들었지만 그 효과는 매우 컸다. 그제서야 사람들은 인텔이 컴퓨터 칩을 만든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에 따라 인텔은 무명에서 최고의 브랜드로 급부상했다.
<파이낸셜 월드> 매거진이 1993년에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인텔은 브랜드 가치면에서 세계3위를 차지했다. 말보로, 코카콜라의 뒤를 이은 3위로서 브랜드 가치는 대략 178억 달러에 달했다.
인텔은 '인텔 인사이드'광고 캠페인에 이어 펜티엄 칩에 대한 대대적인 광고를 벌였다. 광고내용은 펜티엄이 가장 성능 좋은 최신 PC칩이라는 것이었다. 인텔은 광고를 통해 "인텔칩이 내장된 만큼 여러분은 비길 데 없는 품질을 누리게 되었습니다."라고 선전했다. "비길데 없는 품질"이라는 표현이 1994년 후반들어 다소 과장된 표현으로 비치게 된 사건이 벌어졌다. 버지니아 린치버그 대학의 수학교수인 토머스 나이슬리가 자신이 사용하는 석대의 펜티엄 컴퓨터에 오류가 생기고 있음을 발견했던 것이다. 그는 오류발생 원인을 철저하게 규명하겠다는 생각에서 그 내용을 인터넷에 올렸다. 기적같은 현대 테크놀러지에 힘입어 사소한 수리(數理)상의 문제가 국제적인 사건으로 비화되었다. 1994년 12월, IBM은 그같은 오류발생 PC의 출하를 중지한다고 발표했고 인텔은 더 이상의 손실을 막는 쪽으로 맹렬한 홍보를 펼쳤다.
무어의 법칙이 예측한 것처럼 이런 당혹스런 상황은 이내 뒷전으로 밀려났다. 테크놀러지와 인텔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인텔의 마케팅 포커스는 1970년대초의 제품 특성 중심의 판매에서 최종 고객과의 직접적인 제휴로 이동했다. 그것도 가차없는 스피드와 또 명쾌한 목적과 인식아래 그 같은 이동을 이루어냈다.
Kodak - 코닥
어느 문필가는 "현대광고는 '버튼만 누르면 나머지는 우리가 처리하겠다'는 슬로건과 함께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고 기술했다. 이른바 스냅촬영은 이같은 슬로건과 함께 탄생했다. 이 광고 슬로건을 만든 사람은 조지 이스트먼(George Eastman)이었다. 그는 이스트먼 코닥사의 설립자이자 초기의 사진필름을 만든 사람이기도 하다. 그는 1888년에 처음으로 간단하게 촬영할 수 있는 카메라를 만들었다. 이스트먼은 특이한 형태의 브랜딩을 이뤄낸 인물이기도 했다. "상자안(카메라)에서 작동하는 것을 믿으라"는 브랜딩이었다.
"코닥"이란 명칭은 1888년에 처음으로 상표로 등록되었다. 이후 코닥이란 상호의 유래를 둘러싸고 여러 가지 추측이 난무했지만 이스트먼이 직접 창안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자신의 전기 작가에게 코닥이 등장하게 된 과정을 이렇게 설명했다. "나는 이 상호를 직접 만들어냈다. 본래 'K'란 글자가 마음에 들었다. 강하고 날카로운 인상을 주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K'자가 앞뒤로 붙는 명칭을 만들려다 보니 수많은 글자의 조합이 나타났다. 이런 과정을 거쳐 코닥이 등장했다"
이런 명칭 뿐만 아니라 브랜드를 감싸는 황색과 흑색의 두드러진 색깔도 이스트먼이 직접 골랐다. 오늘날 그 명칭과 색깔은 브랜드로 어우러져 이 회사의 가장 값진 자산중 하나가 되었다.
코닥 브랜드에는 항상 이노베이션이 필수적인 요소인양 따라다녔다. 오랫동안 코닥은 사진 촬영을 더 단순하고 즐거우며 쓰임새있게 만들기 위해 신제품과 새로운 프로세스를 수없이 내놓았다. 그 때문에 코닥은 아메리카의 여러 가지 추억만들기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토탈 리서치 사가 실시한 브랜드 조사결과에 따르면 1996년 미국 소비자들은 세계에서 가장 인지도가 높고 가장 호평받는 브랜드로 코닥을 꼽았다. 그러나 1980년대말과 1990년대초에 코닥은 후지필름과 다른 경쟁업체들의 등장으로 위협을 받게 되었다.
결국 1997년이 되면서 코닥이 뒷걸음질치기 시작하자 CEO인 피셔로서는 2만여명의 간부와 일반 종업원을 감원하고, R&D부분도 재정비하였다. 또한 새로운 인스토어 브랜드 사업은 세가지 타입의 필름에 집중되었다.
·다양한 용도를 충족시킬 수 있는 맥스(Max) - 맥스는 코닥에서 내놓은 1회용 카메라의 브랜드이기도 하다.
·코닥골드 - 가격에 민감한 옛 고객들이 근년에 값싼 후지필름 쪽으로 고개를 돌렸는데 바로 이들을 겨냥한 것이다.
·전문가와 사진광을 위해 내놓은 셀렉트 그룹 - 이중에는 어드밴틱스, 로열골드, 엘리트, 코다크롬 등이 있다.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회사인 코닥이 새로운 모습으로 거듭 태어나 디지털 시대에 제대로 적응할 것인지, 아니면 조용히 사라질 것인지는 앞으로 몇 년안에 드러날 것이다. 어느쪽으로 나아가든 간에 코닥 브랜드는 어떤 형태로건 살아남을 가능성이 많다. 그냥 사라지기에는 너무나 값진 브랜드이기 때문이다.
Sony - 소니
모리타 아키오(Akio Morita)는 제2차 세계대전 중 해군장교로 복무했다. 물리학을 전공한 그는 본인이 원했다면 가업인 주류제조업에 종사할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이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주류 제조업체 중 한 곳의 15대 가업 계승자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는 가업을 잇지 않고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직후 이부카 마사루(Masaru Ibuka)와 함께 회사를 설립했다.
두 사람은 845파운드에 해당하는 돈을 갹출해 폭격으로 파괴된 도쿄의 어느 백화점에서 사업을 시작했다. 이부카가 기술자였던 만큼 세일즈맨 역할은 모리타가 맡았다. 이들이 만든 회사의 명칭은 도쿄통신 공업 주식회사였다. 처음에 이 회사는 라디오 부품과 전기밥솥을 생산했으나 고객들의 전기밥솥에 대한 반응은 시원찮았다.
오늘날 소니사의 한 해 매출은 450억 달러에 이르며 종업원은 10만명이 넘는다.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이 회사는 미국에서 가장 신뢰받는 브랜드로 나타났다.
1949년 이 회사는 자기(磁氣)녹음 테이프를 개발했고, 1950년에는 일본최초의 녹음기를 만들어냈다. 다시 1957년에는 호주머니에 들어갈 만한 소형 라디오를 개발했고, 이듬해에 회사이름을 소니로 바꿨다(소니는 소리라는 뜻의 라틴어 "sonus"에서 따온 것이다). 그 후 소니라는 브랜드는 모든 제품에 부착되었다. 뒤이어 1960년에는 세계최초의 트랜지스터 TV를 만들어냈다. 이후 소니는 점차 세계 시장을 석권해나갔다. 첨단 기술 개발로 제품의 소형화를 추구한 결과 소니에 대적할 만한 회사가 없었다.
소니는 세계 최초로 손에 들고 찍을 수 있는 비디오 카메라와 홈비디오 리코더, 플로피 디스크를 내놓았다. 모리타의 아이디어 중에서 성공을 거둔 가장 유명한 제품은 워크맨이었다. 모리타는 젊은이들이 언제 어디서나 음악을 듣고 싶어한다는 사실에 주목해 이 제품의 아이디어를 내놓았는데, 워크맨이야말로 소니의 전설이 되다시피한 제품이다.
현재 소니의 회장직을 맡고 있는 이데이 노부유키(Idei Nobuyuki)는 창업자의 경영이념을 반영하듯, 이렇게 말한다. "지금 당장 엔지니어가 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직관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그런 감각 없이는 소니같은 회사를 이끌어갈 수 없다."
Xerox - 제록스
제록스는 뛰어난 테크놀러지 브랜드중 하나다. 또한 브랜드 명칭과 브랜드 제품이 거의 하나로 인식되다시피 하기 때문에 일상에서도 예사롭게 브랜드가 통용된다. 이 회사가 제록스란 브랜드를 얻게 된 것은 전자복사 기술의 한 과정을 표현하는 용어 (xerographic)에서 따온 것이다. 미국인들은 지금도 문서를 복사할 때 "제록스(Xeroxing)"란 용어를 쓴다.
전자복사 기술을 발명한 체스터 칼슨(Chester Carlson)은 1906년 시애틀에서 태어났다. 그 해 뉴욕 로체스터에 핼로이드사(Haloid Company)가 설립되어 전자 복사지를 생산·판매했다. 1938년, 칼슨은 최초의 전자복사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1947년 핼로이드사는 바텔(Battelle)사로부터 칼슨이 따낸 전자복사 특허권의 사용허가를 얻었다. 1년 뒤 두 회사는 전자복사기 개발을 발표하면서 "제록스"와 "제로그라피(Xerography)"란 용어의 독점 사용권을 따냈다.
1949년, 최초의 전자복사기 A형이 시판되었다. 1958년에는 핼로이드사와 랭크 오거니제이션의 합작으로 영국에 랭크 제록스 사가 설립되었다. 같은해 핼로이드사는 상호를 핼로이드 제록스사로 바꾸었다.
1959년에는 최초의 일반 용지용 자동 복사기인 제록스 914가 출시되었다. 이 제품이 나온 직후 <포춘>지는 제록스914야말로 "미국에서 시판된 제품중 가장 성공적인 상품"이라고 극찬했다. 다음해 핼로이드 제록스는 바텔로부터 전자복사기 관련 특허권을 모조리 사들였다.
1961년 이 회사는 다시 제록스사 (Xerox corporation)로 회사 명칭을 바꾼 뒤 뉴욕 증권 거래소에 주식을 상장했다. 그 다음해 후지 제록스가 설립되었다. 제록스는 1969년 랭크 제록스사의 주식을 절반이상 인수했다.
그즈음 제록스사는 시장을 거의 독점하다시피 했지만 변화의 조짐은 이미 꿈틀거리고 있었다. 코닥을 비롯, 여러 군소업체들이 무시못할 경쟁업체로 성장했고, 그제서야 제록스는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지만 그때는 이미 점유시장의 절반이상을 잃은 상태였다. 이에 따라 제록스는 혼신의 힘을 다해 비상한 노력을 전개했다. 제록스는 우선 품질 운동에 열성적인 노력을 기울이면서 "처음부터 올바르게" 원칙을 모든 기업활동에 도입했다. 그로부터 몇 년 안되는 짧은 기간동안 제록스는 제 페이스를 회복하게 되었다.
모든 테크놀러지 브랜드가 반드시 깨달아야 할 한가지 교훈이 있다면 그것은 단 1초도 승리나 영광에 안주할 여유가 없다는 것이다. 기술 혁신을 이루지 못하면 사라지고 만다는 것이 엄연한 현실인 것이다. 제록스는 이제 새로운 패러다임을 마스터 했음을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Federal Express - 페더럴 익스프레스
페덱스는 1971년 설립자 프레드 스미스(Fred Smith)가 360만 달러를 들여 팔콘 제트기 두 대를 구입하면서 출범하게 되었다. 스미스는 사업을 시작하면서 주제넘는다고 볼 수 밖에 없는 거창한 약속을 내걸었다. "밤 사이의 배달을 보장하겠다"고 약속했던 것이다. 그의 비즈니스 철학은 사람을 최우선시 한다는 단순한 원칙에 바탕을 두고 있다. 알맞은 인력을 뽑아들여 제대로 대우하면서 탁월한 서비스를 발휘하도록 하면 고객들이 기꺼이 그런 서비스를 받아들여 이윤을 얻게 된다는 생각이다. 이처럼 지극히 단순한 방식이 브랜드의 위력을 뒷받침하고 있다. "친절한 얼굴을 앞세운 신뢰성"이 바로 페덱스 브랜드의 위력인 것이다. 페덱스는 회사와 시스템의 원만한 운용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의 헌신성에 기반을 두고 있다. 페덱스 직원들은 스스로 '자주빛 기질'을 한껏 내세운다(자주빛은 이 회사 록의 주된 컬러다). 페덱스의 경영 관리자들 대부분은 일선, 즉 급송 담당자로 활동하던 사람들이다. 따라서 이들의 머리 속에는 오로지 고객만을 생각하는 고객 중심의 의식이 깊숙히 배어있다. 전세계 급송운송시장은 현재 120억 달러 수준에 머물고 있지만 2007년경에는 1,500억 달러로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페덱스는 날로 높아가는 브랜드 성가(聲價)에 힘입어 매우 유리한 입지를 확보하고 있다. 그러나 불확실한 요소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인터넷과 전자우편이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 하는 점이다. 페덱스는 본래 문서 급송에 역점을 두고 있는 업체이기 때문이다.
Goodyear - 굿이어
찰스 굿이어(Charles Goodyear, 1800∼1860)은 운좋은 사람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불운에 대해 달관한 듯한 태도를 보였다. 가령 이런 식이었다. "사람의 인생을 오로지 돈의 잣대로만 평가해서는 안된다. 나는 내가 뿌린 것을 다른 사람이 거두는 것에 대해 불만을 토로할 생각이 없다. 안타까울 때가 있다면 자신이 뿌린 씨를 아무도 거둬들이지 못할 때 뿐이다."
굿이어는 생고무의 경화 처리방법을 개발했다. 이로 인해 별로 쓸모가 많지 않던 끈적끈적한 생고무는 다양한 용도로 쓰이게 되었다. 굿이어 스스로 일반적인 쓰임새 이외의 다양한 용도로 고무를 활용했다. 그런 실험적 용도로는 고무로 만든 모자, 조끼, 넥타이, 지폐, 책 등이 있었다. 이처럼 굿이어는 고무의 다양한 쓰임새를 개발했지만 특허출원으로 권리를 확보하는데는 서툴렀고, 이를 상업화시키는 데도 치밀함을 보이지 못했다. 그 때문에 그는 거의 돈벌이를 하지 못했다. 한때는 스테이튼 아일랜드에 있는 도산한 고무 공장 한귀퉁이에서 가족들과 살면서 물고기를 잡아 끼니를 이은 적도 있었다. 그는 자신의 권리와 아이디어를 도용하는 파렴치한 특허권 침해자들을 물리치기 위해 많은 돈과 시간을 바쳤다. 소송에서 승리한 적도 있었다. 1852년 미국 대법원은 굿이어의 특허권 침해를 불법화시키는 판결로 그의 손을 들어주었다. 그는 자신의 변호사인 다니엘 웹스터(Daniel Webster)에게 승소의 대가로 1만 5,000 달러의 거금을 지불했다. 그러나 대법원 확정판결에도 불구하고 특허권 침해행위는 그가 숨을 거둘 때까지 계속되어 그의 부채는 20만 달러로 늘어났다.
그러나 세계 최대의 고무회사인 굿이어 타이어&고무회사는 찰스 굿이어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의 이름조차 차용하지 않았다. 이 회사는 1989년 프랭크 A.사이벌링 (Frank A. Seiberling)이 설립했으며, 오하이오 주 이스트 애크론에 있는 공장에서 말굽패드와 자전거, 마차의 타이어, 소방호스, 포커칩 등을 만들었다. 이 회사는 첫 출발부터 순조로웠다. 첫달 매출이 8,246달러나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굿이어는 1980년대 후반부터 이런저런 문제에 부딪치게 되었고, 일본의 브리지스톤이 미국 타이어 회사인 파이어스톤을 인수하면서 이런 퇴조는 더욱 극적으로 부각되었다. 굿이어는 여러 가지 난관에 능동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1999년초 과감한 조치를 발표했다. 즉 경쟁업체인 일본의 스미토모와 제휴를 결정했던 것이다. 1997년에 47억 달러의 매출을 기록했던 스미토모는 던롭 브랜드 사용권을 지니고 있었다. 굿이어는 이같은 제휴로 3억 달러 내외의 경비를 절감하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또한 두 회사는 제휴를 통해 각각 일본과 북미·유럽 시장에서 상당한 경쟁력을 누리게 되었다. 또한 전략적 제휴로 두 회사는 총 695억 달러의 세계 타이어 시장 중 22.6%를 차지하게 되어 선두로 나서게 되었는데, 그 뒤를 18.6%의 브리지스톤과 18.3%의 미셰린이 따르고 있다. 이같은 제휴로 굿이어가 이런저런 어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는 아직 불투명하다.
Alabama Reassurance Company - 알리바마 리어슈어런스 컴퍼니
알라바마주의 재보험회사라는 의미
Barclays - 바클레이즈
창업자인 John Freame의 사위인 James Barclay가 파트너로 들어오면서 그의 이름을 회사명에 도입
Chase Manhattan Bank - 체이스 맨하탄 뱅크
전신회사인 물파이프를 만드는 Manhattan company에서 비롯
Connecticut General Life - 코네티컷 제너럴 라이프
코네티컷주에 있는 보험사라는 의미
FleetBoston Financial Corporation - 플릿보스턴 파이낸셜 코퍼레이션
창업자의 이름과 본사의 지명을 결합한 표현
J.P. Morgan - 제이피모건
J.Pierpont Morgan이 1890년 아버지인 Junius Morgan의 가업을 이어 본격적인 금융서비스를 시작하면서 활용한 명칭
Lincoln National Life Ins Co - 링컨 내셔날 라이프
미국의 초대대통령이름을 직접활용
Merril Lynch - 메릴린치
창업자인 Charles E. Merrill와 친구인 Edmund C. Lynch와의 동업을 의미
North American Life Assurance Company - 노스 아메리카 라이프 어슈어런스 컴퍼니
북아메리카라는 넓은 지역을 포괄하는 이름
Paul Revere Life Insurance Co - 폴리브르 라이프 인슈어런스
창업자명인 Paul Revere을 활용
Philip Morris Capital - 필립모리스 캐피탈
필립모리스사의 금융계열사로서 창업자명을 활용
ZDTV - 지디티비
Z(빠른 느낌, 알파벳 마지막철자) + D (디지털)의 결합으로 첨단의 느낌전달
Aigner - 아이그너
20C초 헝가리에서 태어난 Etienne Aigner의 이름을 브랜드화. 처음 가죽용품 디자이너로 잘 알려지게 되었고 명성을 쌓으면서 점차 토탈패션을 갖추게된다.
Anna Sui - 애너수이
[백인 천하]라 할만큼 유색인 종이 드문 디자인분야에서 중국계 디자이너이 수이는 오로지 실력으로 90년대 뉴욕을 대표 하는 디자이너로 떠올랐다. 그는 한물 간 스타일에 생기를 불어넣어 현대적으로 변형시키는 장기 를 지녔다. 92년 내놓은 나팔바지, 허리선이 낮고 엉덩이가 꼭 끼는 바 지,비틀스 재킷은 패션계에 70년대 복고풍 바람이 일기 시작했음을 알리 는 신호탄이 됐다. {디자이너란 전혀 새로운 트렌드를 만들어내기보다 옛것을 신선하게 다시 보여주는 사람}이라고 그는 믿는다 .그는 95년세컨드 라인 [수이 애너 수이]를 선보인 데 이어 올들어서는 [애너 수이 파티] [애너 수이 진즈]를 내놓으며 사업을 착실히 넓혀가고 있다.
Benetton - 베네통
루치아노 베네통.이탈리아의 가난한 시골소년이었던 그는 창의적인 아이디어와 신선한 제품을 통해 매출액 1조원이 넘는 거대 기업의 대표로 성장한다. 옷을 파는 회사임에도 옷을 광고하지 않는 베네통. 파격적인 광고와 원색적인 칼라로 대변되는 브랜드로서 회사의 대표인 그가 93년 스스로 벌거벗고 광고에 출연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Boss - 보스
1923년 Hugo Boss에 의해 독일 남부의 슈트트가르트 부근의 Metzingen 에 본사를 두고 출발보스가 세계 남성을 사로잡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연령별, 취향별로 타겟층을 확실히 분류하여 공략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보스는 현재 3개의 브랜드를 가지고 있으며, 이 각각의 브랜드는 2050대 후반까지의 남성 소비자층을 빈틈없이 흡수하고 있다.<성공 비즈니스맨의 자신있는 여유Boss Hugo Boss>,<18세부터 30대 초반까지 캐릭터가 강한 젊은층을 타겟층으로 한 Hugo hugo boss>,<세련되고 품격있는 중년의 카리스마Baldessarini Hugo Boss>
Burberry - 버버리
영국의 품격을 대변하는 패션 브랜드 버버리. 우수한 품질과 뛰어난 실용성을 겸비한 개버딘을 개발한 토마스 버버리는 영구의 국왕 에드워더 7세의 많은 사랑을 받으며 국왕을 위한 개버딘 코트를 진상하였다. 에드워더 7세가 코트를 입을 때마다 “내 버버리를 가져오게”라고 말한 것이 궁전 밖까지 퍼져 브랜드명으로 정착한 버버리는 옥스퍼드 사전에도 이름을 빛내고 있으며, 10년마다 갱신되는 왕실의 인가와 함께 영국 왕실의 지정 상인으로서의 명예를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Calvin Klein - 캘빈클라인
미국 패션을 이끌어온, 가장 미국적인 디자이너를 꼽히는 캘빈 클라인은 극도로 장식을 배제해 깨끗한 재단과 실루엣, 다른 디자이너들이 미처 관심을 기울이 지 않았던 청바지와 속옷, 향수라는 틈새시장 개척, 섹스를 연상시키는 도발적 광고응으로 대변된다. 시대를 꿰뚫어보는 정확한 마케팅전략과 과감한 개척 정 신으로 그는 70년대부터 남녀노소, 부자 서민 할 것 없이 어떤 디자이 너도 넘보지 못할만큼 폭넓은 고객층을 거느리고 있다.
Chanel - 샤넬
가브리엘 샤넬(Gabrielle Chanel )은 1883년 프랑스 소뮈르에서 태어났다. 일찍 고아가 된 그녀는 할머니에 의해 수녀원에 들어가게 되고 거기서 그녀가 즐겨 부른 노래인 "Qui qu'a vu Coco"에서 그녀의 닉네임인 COCO를 얻게 된다. 샤넬의 성공은 전시에 빛을 발하게 되었는데, 전시에도 식을 줄 모르는 여성들의 패션에 대한 욕구와, 사치스럽고 거추장스러운 옷을 싫어하는 취향에 잘 맞아떨어졌고, 패션디자이너로서의 명성은 전쟁을 겪으면서 더욱 더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그녀의 향수 Chanel No. 5는 1921년에 나왔는데 마를린먼로가 잘때 몸에 걸치는 유일한 것이라는 말로 후에 더욱더 유명해 진다.
Christian Dior - 크리스챤디오르
한 사람만을 위한 특별한 옷, 오트 쿠튀르를 대표하는 패션 브랜드 크리스찬 디올 여성의 아름다움을 극대화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하고 있는 크리스찬 디올은 의상과 액세서리 등을 비롯하여 화장품에 이르기까지 여성들의 꿈을 실현하고 있다. 현재 크리스찬 디올은 LVMH GROUP에 속해있는 브랜드이다. LVMH는 약자에 나타나 있는 대로 LOUIS VUITTON, MOET HENNESSY를 비롯하여 CELINE, GIVENCHY, CHRISTIAN DIOR, GUIRLAI과 최근 DFS 주식을 반 이상 소유하게 된 세계적인 패션 그룹이다.
Christian Lacroix - 크리스챤라크로와
그는 {정반대되는 것들이 조화를 이룰 때 매혹된다}고 말한다. 그 래서 천조각을 기워 만드는 패치워크가 조화의 극치라고 찬양한다. 그의 패션을 주도하는 컬러는 오렌지, 빨강, 살구색. 화려하다. 집 시들이 즐겨 쓰는 울긋불긋한 색들, 들소의 선정적인 검정도 좋아한다. 그래서인지 초반기엔 무대의상에 대한 열정이 대단했다. 오페라 [타락 한 천사]와 [카르멘] 의상을 만들었다. 72년 소르본대학에서 미술학을 전공한 그는 원래 박물관 관리자를 꿈꾸다가 78년 우연하게 에르메스 디자인숍에서 액세서리 디자이너로 일하면서 페션계에 발을 들여놓았다. 여성복 성공에 힙입어 96년엔 입기 편하고 실용적인 크리스티앙 라크르 와 진을 만들었고 이후 액세서리 라인(89년), 바자르 라인(94년), 홈 컬렉션(95년)으로 영역을 넓혀갔다.
Dloce & Gabbana - 돌체앤 가바나
도메니코 돌체와 스테파노 가바나의 성을 따서 만든 브랜드로서 서로 상반되는 외모, 환경, 개성을 지닌 두 디자이너의 조화를 이룬 제품을 선보인다. 후속브랜드로 D&G가 있다
Donna Karan - 도나카란
여성적인 직감과 성공을 위한 창조적인 직관력을 가진 디자이너 도나카란(Donna Karan)은 단지 의상에만 국한하지 않고 라이프스타일에 대한 디자인을 추구한다. 위크데이에서 위크엔드로, 시즌에서 시즌으로 적용 가능하고 전세계의 여성과 남성을 위해 디자인된다. 또한 빠르게 변하는 도시에서 느낄 수 있는 속도와 도시적인 태도를 나타내기 위해 뉴욕 라벨을 사용한다. 그녀의 딸 개비(GABBY)에게 입히고 싶은 욕망과 그녀의 완벽한 진에 대한 추구는 1988년 DKNY의 탄생을 가져왔고 DKNY는 매우 대중적으로 커져서, DKNY JEANS, DKNY ACTIVE, DKNY UNDERWEAR, DKNY KIDS, 그리고 가장 최근에 만든 DKNY BABY등과 같은 컬렉션으로 DKNY를 늘린 다른 라벨로 다양하게 전개되었다
Emanual Ungaro - 엠마누엘 웅가로
프랑스 남부의 악상 프로방스에서 태어난 이탈리아인으로 테일러였던 아버지 밑에서 22세까지 신사복의 재단, 재봉, 가봉 기술을 배웠다. 1968년 텍스타일 다지아너 소니아 냅의 협조를 얻어 새로운 프린트를 개발하고 이것을 이용한 “레이어드 룩”을 발표하여 센세이션을 얼으켰다. 이것은 몇 종류의 의상을 겹쳐 입는 스타일인테 웅가로 특유의 미묘한 컬러 하모니와 어울려 관중들로부터 “색채의 마술사” 혹은 "프린트의 시인”이라는 호칭을 얻었다. 그는 모드에 색채의 중요성을 클로즈업시킨 최초의 디자이너로서 전세계 패션에 색채의 세련된 센스를 일깨워 준 장본인이다.
Ermenegildo Zegna - 에르메네질도 제냐
1910년 비엘라 알프스의 작은 지역인 트리베로에서 에르메네질도 제냐의 이름을 딴 브랜드.그는 아버지의 원단 사업을 시작으로 남성복을 위한 최고 품질의 원단을 생산하기 위해 기술개발과 직원들의 훈련, 브랜드 프로모션 등을 통해 최상의 상픔을 탄생시킴
Giani Versace - 지아니베르사체
이탈리아 남부 칼라브리아 출신 '촌뜨기'가 이탈리아 패션 1번지 밀라노에 등장한 것은 스물여섯살 나던 72년. 제니, 발렌티노 등 유명 패 션회사 디자이너로 일하던 그는 6년만인 78년 '지아니 베르사체' 상표를 내걸고 독립했다. 베르사체는 패션이 어떻게 '사업'이 되는지를 알았던 '신세대' 천재 디자이너중 하나다. 디오르, 입 생 로랑 등 그의 앞 세대 디자이너들이 고급 맞춤복에 전념했다면 그는 생활 양식-라이프 스타일을 지배하는 디자인 산업으로 패션을 확산시켰다. 로마 신화 태양신의 얼굴을 따온 베르사체 상표는 소비자들에게는 '고 급품'의 상징이 되었다. 베르사체의 후속브랜드로 베르수스(Versus)가 있다
Giorgio Armani - 지오르지오 아르마니
조르지오 아르마니의 이름 뒤에는 늘 재킷의 왕자, 패션의 제 왕, 킹 오브 밀라노라는 수식어가 따라 다닐 정도로 세계인을 매료시킨다. 원래 의학도의 길을 가다가 밀라노 대형백화점 리나센티에 남성복 바이어 조수로 들어갔다디자이너의 길을 걷게된다. 숨가 쁘게 유행이 돌변하는 속에서 그는 역설적이게도 한결같은 색상과 스 타일로 세계 패션을 제패한다.[사람들을 미치지 않게 만들면서, 잘 차려 입었다는 만족감을 줄 수 있는 편안하고 품격있는 옷]을 추구하는 그는 GIO, Mani, Emporio Armani등으로 브랜드를 확장하고있다
Givenchy - 지방시
프랑스의 보베에서 태어난 지방시는 파리 대학에서 미술과 법률을 전공하는 한편 17세부처 보자르 예술학교에 패션 디자인을 공부하였다. 1945년 패션 디자이너로 입문하여 피게, 르롱, 파트 등에서 일을 하다 1949년부터 2년간 스키아파렐리 밑에서 “실용적이고 입기 편한 의복”의 개념을 익혔다. 그의 디자인은 특별한 고안이나 천박함이 없이 하이 패션의 전통속에서 의상을 창조 한다는 것이 특징이다. 우아함을 강조한 그의 이브닝 드레스는 매우 유명하다. 항상 여성적인 아름다움을 강조하는 위베르 드 지방시의 의상은 특히 영화 배우 오드리 헵번이 즐겨 입었고, 재클린 케네디 등 미국 사교계에서 영국 황실에 이르기 까지 수많은 여성들이 즐겨 찾는 모드가 되었다.
Jean Paul Gautier - 장폴 고띠에
프랑스 패션계의 앙팡 테리블[악동]으로 불리우는 그는 전통적인 스코틀랜드식 체크무늬 스커트를 두르고 다닌다. 그가 만들어 내놓는 옷만큼이나 기괴한 차림이다. 끊임없이 기존 질서에 도전하고 새로운 방식을 모색해온 그를 상징 하는 차림이기도 하다. [재미는 내 천성이며, 내가 만든 옷에 일관돼 온 주제이자 특징]이라고 말하는 그는 93년 [키카], [잃어버린 아이들 도시]에서 의상을 맡아 영화와 인연을 맺더니, 최근 뤽 베송감독의 [제5원소]에서 기상천외하고 미래적 인 옷으로 눈길을 사로잡았다. 그의 옷과 행각에는 [선정적] [무례] [일탈] [고상하지 못한]이라 는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하지만 그 뒤에 그는 [남녀와 인종을 구분 하지 않는 평등]이라는 신념을 깔고있다. 여성복을 통해 전세계를 뒤흔드는 성공에 힘입어 남성복(84년), [주 니어 고티에](88년),[고티에 진](92년), 향수(93년)로 사업을 확장했다.
Jinteok - 진태옥
그는 한국에 [패션]이라는 말조차 생소하던 60년대 중반, 양장점 주인으로 첫 발을 내딛은 이래, 자존심과 열성, 남다른 비전으로 [아무도 가지 않았던 길]을 개척해왔다. 결혼후 명동 [이종천패션연구소]를 찾아가 뒤늦게 의상을 공부한 그녀는 이대 앞에 양장점 [디 쉐네]를 냈고 3년뒤 명동으로 의상실을 옮기고 가게 이름도 [프랑소아즈]로 바꿨다. 미국을 돌면서 국내에 기성복 도입의 필요성을 깨닫고 돌아오자마자 고객 평균체격지수를 산출해 기성복 치마와 블라우스를 만들었다. 현재 그녀는 해외 11개국 31개 매장에 자기 옷을 내걸고있으며 파리컬렉션에 시즌마다 참가하고있다.
Kenzo - 켄조
다카다 켄조는 1939년 일본에서 태어나 60년대에 파리에 발을 딛었다. ‘가장 프랑스적인 일본 디자이너’라는 평가를 받으며 급속도로 정상에 오른 켄조는 아시아의 젊은 디자이너들에게 ‘제2의 켄조’를 꿈꾸게 했다. 유럽 아프리카 중국 등의 이국적 문화를 다채로운 색상과 디자인으로 버무려낸 그는 값싼 티셔츠부터 최고가의 오트쿠튀르 이브닝드레스까지, 10대 청소년부터 60대 노인층을 위한 옷까지 가격과 연령대를 가로질러 폭넓은 작품세계를 키워냈다. 켄조가 세운 패션업체 켄조사(社)는 93년 루이뷔통모에헤네시(LVMH) 그룹에 합병되면서 더 많은 매장을 확보하며 세계로 퍼져나갔다.‘즐거움과 유머’는 켄조 디자인의 대표적인 특징.
Lanvin - 랑방
프랑스의 브르타뉴에서 태어난 잔느 랑방의 이름을 브랜드화. 13세에 파리 모자점에 봉제사로 들어가 기본적인 의상업을 익힌 그녀는 결혼 후 딸에게 직접 해입힌 옷으로 호평을 받아 이를 계기로 1890년 포브르 생토노레에 작은 꾸뛰르의 메종을 개설하였음. 랑방은 로맨틱적이고 엘레강트한 작풍으로 고객을 사로잡았음. 특히 화가의 그림을 모티프로한 “픽처 드레스”, 중세 교회의 스테인트 글라스에서 힌트를 얻은 “랑방 블루”는 유명함.
Levi's - 리바이스
청바지를 고안한 1853년 미국 서부의 광부 리바이 스트라우스의 이름을 딴 명칭으로서 개발초기의 질기고 튼튼한 작업복으로서의 실용성과 젊은 세대의 패션성을 가미한 브랜드로 재탄생.
Loewe - 로에베
독일인 앙리크 로에베 로젠베르크의 이름을 딴 브랜드. 1846년 스페인의 마드리드에 정착한 그는 가죽공방을 열며 품질좋은 스페인산 가죽에 독일인의 장인정신을 접목시킨 제품들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의 풍부한 색감과 창의성이 담긴 가죽제품은 스페인 상류사회에 알려졌으며 1905년에는 스페인 왕실의 공식 납품업체로 지명받았다. 이후 영국 빅토리아여왕, 엘리자베스여왕, 심프슨 부인은 물론 스페인 소피아왕비와 유럽왕실 가족들을 주요고객 명단에 올려둘 만큼 세계적인 지명도를 자랑하고 있다.
Louis Vuitton - 루이비통
목공기술과 옷가지를 정리했던 경험을 조화시켜 루이비통은 1854년 뤼 뇌브 데 까푸신느(Rue nerve des capucines) 4번가에 상점을 개설하고 최초의 평평한 트렁크를 개발한 이래가방을 만드는 최고의 장인으로서의 그의 명성을 높혀왔다. 그의 깔끔함, 창작성, 그리고 일에 대한 헌신은 루이비통을 성공으로 이끌었다. 대를 이어 내려오는 엄격한 장인 정신은 루이비통의 창조적인 실험정신과 함께 그의 아들 조르쥬 비통에게로 전해졌다.
Missoni - 미쏘니
오타비오 미소니 (OTTAVIO MISSONI), 로지타 미소니 (ROSITA MISSONI) 부부의 성(姓)을 딴 브랜드로서 기하학적인 모양과 추상적인 모양의 니트로 폭발적인 인기를 끌어 니트 웨어를 고정 상품으로까지 레벨업시켜 상류층의 심벌이 되었다.
Paul Smith - 폴스미스
원래 영국을 대표하는 사이클 선수였던 그느 17세 때 심한 사고를 당했고 진로를 바꾸어 패션계에 입문하게 되었다. 영국의 미드랜드 지방의영세 소매업자로 시작한 그는 그만의 개성있는 스타일을 통해 영국 제 1의 남성복 디자이너로 성장했다.
Prada - 프라다
프라다가 패션에 발을 들여놓게 된 것은 전적으로 가업을 잇기 위해 서였다. 밀라노에 고급 가죽가게를 운영하던 할아버지의 사업을 이어받아 가방사업에 성공하면서 패션디자인을 시작하게된다. 대학에서 정치학을 전공한 미우치아 프라다는 말로 디자인을 한다. 디자인팀을 모아 자기가 생각하는 스타일을 전달하고 거기에 맞는 소재와 재단법을 함께 찾는다. 그는 그렇게 해서 장식을 배제하고 극도로 단순한 미니멀리즘 의상으로 90년대 유행을 이끌어왔다. 하지만 정작 [유행]에는 관심이 없다. 한순간 유행으로 그치고 말 옷보다는 사람들이 두고두고 편하게 입 을 옷 만드는 게 목표다. 10대 후반~20대 후반 여성을 겨냥 한 [미우미우](93), 남성복 [프라다 우오모](95), 언더웨어 [프라다 인티모](97), 스키웨어(") 에 이어 화장품, 향수, 홈컬렉션으로 영역을 확대하고있다.
Salvatore Ferragamo - 살바토레 페라가모
1898년 이탈리아 나폴리에서 태어나, 형제들을 위해 구두를 만들기 시작한 그는 16살때 미국 인근 캘리포니아 대학에 등록을 한 후 인간해부학에 대한 공부를 시작했다. 인체공학적으로 착용감이 좋으며 어느 의상과도 쉽게 매치된다는 장점을 가진 그의 제품들은 20대여성부터 50대까지 폭넓은 고객들의 사랑과 지지를 받고 있다.구두라는 아이템으로 명성을 쌓은 브랜드를 통해 명실상부한 토탈 패션사업을 전개하게 된다.
Sonya Rykiel - 소니아 니키엘
파리에서 태어난 그녀는 20세에 결혼하여 평범한 가정주부 생활을 하다가 임신복으로 입을옷을 고르려고 몇 군데 가게를 돌다가 실망하고 직접 디자인한 옷을 입었는데 이것이 최초의 작품이 되었음. 홈웨어나 일상복으로 여겨져 온 니트웨어를 파티 드레스 등 고급 정장으로 끌어올린 공로자이기도 한 소니아 니키엘은 패션에 있어 실용성을 중요시하는 디자이너이다.“니트의 여왕” 혹은 “현대의 코코샤넬”이라고 불리움.
Yohji Yamamoto - 요지 야마모토
도쿄에서 태어난 야마요토는 학창시절 로마네스크식의 프랑스 문화와 미국의 팝문화에 급속히 영향을 받았고 도쿄의 명문인 게이오 대학을 졸업한 후 디자이너의 길을 시작하게 되었다. 후속브랜드인 YSACCS는 '요지야마모토의 액세서리'의 약자를 의미하며 구두, 가방, 지갑, 벨트등의 토탈라인을 갖춘 브랜드이다
Banana Republic - 바나나 리퍼블릭
갭 그룹의 프레스티지 존으로서 라틴 아메리카의 쿠바와 니카라과를 이미지화한 브랜드
Carte Blanche - 까르떼 블랑슈
프랑스어로서 직역하면 '흰색카드'라는 의미이며 자유로움을 보장받는 모든 권한을 의미한다
Club Monaco - 클럽모나코
나이보다 개개인의 고유생활태도에 지배를 받으며 자기 철학이 확실한 도심 속에서 편리함을 추구하지만 꾸미지 않는 자연스러움을 추구하는 내추럴리스트를 표현
Comme des garcons - 꼼므데갸르송
프랑스어로 '소년처럼'이라는 의미로서 젊고 순수한 캐쥬얼브랜드의 이미지표현
Cooldog - 쿨독
Hotdog를 변형한 이름으로서 발상의 전환을 의미
Cuba Livre - 쿠바리브르
쿠바독립을 뜻하는 말로서 쿠바의 살사, 시가, 럼주 등의 쿠바문화를 통해 마케팅강화
Eigen Post - 아이겐포스트
독일어로 '자기의, 자기자신의'라는 의미와 장소표현을 결합한 브랜드
Get Used - 겟유즈드
중고의'라는 의미로서 새것의 낯설음이 아닌 중고의 편안함과 자유로움을 주는 캐쥬얼웨어라는 의미를 직접적으로 표현
Morriscominghome - 모리스커밍홈
Morris is coming home이라는 문장을 활용한 안으로서 긴형태로 모호한 의미전달
On&On - 온앤온
계속해서 ~하다라는 의미로서 Trend에 민감한 젊은 여성에 어필하는 표현
Radio Garden - 라디오가든
라디오와 가든의 합성어로 젊은 세대의 자유로운 사고와 활동성에 부합하는 친근하고 자연스러운 순수함을 담아낸다
Sport Replay - 스포트리플레이
스포트리플레이는 여성캐주얼에서 만족하지 못한 사이즈의 소비자층과 진캐주얼에서 만족하지 못한 스포티한 구성을 바탕으로 컴포터블한 스타일을 추구.
Storm=292513 - 스톰이구이고일삼
강렬한 이미지를 주는 '폭풍'이라는 의미의 자연어와 암호같은 숫자를 결합한 브랜드
Thursday Island - 썰스데이 아일랜드
오스트레일리아의 요크항 서쪽에서 35km 떨어진 곳에 실제로 존재하는 섬이름. 섬을 연상하면 우리가 상상으로 그릴 수 있는 미지의 세계가 있듯 서어스데이 아일랜드는 무한한 가능성의 미래를 젊은이와 함께 열어 간다는 취지.
Who a u - 후아유
간단한 의문문인 Who are you?를 변형한 형태로서 젊은 타깃층의 성향을 반영한 브랜드
About - 어바웃
'..에 관해서'라는 '어바우트'의 의미처럼 'About Him', 'About Her'라는 남,녀라인으로 구성하는 포괄적이고 확장성있는 브랜드
Alpaca - 알파카
動)남미 페루산 야마의 일종으로서 알파카의 털을 이용해 만든 옷이라는 의미
Basic - 베이직
'기본적인'이라는 의미의 자연어로서 패션아이템에 있어 심플하고 필수적인 아이템을 뜻하며 제품의 컨셉을 브랜드로 대변
Elle - 엘르
프랑스어로 '그녀'라는 의미의 인칭대명사로서 여성토탈패션을 망라한다는 포괄적의미의 브랜드
Esprit - 에스프리
프랑스어로 정신,영감(Spirit)을 뜻하는 자연어
Gap - 갭
갈라진 틈새'를 뜻하는 자연어로서 처음에 리바이스의 프랜차이저로 출발했던 갭의 창업자 도널드 피셔는 리바이스의 상품을 취급하면서 전체 상품을 리바이스만으로 하기에는 어딘가 부족하다는 느낌을 갖게 되었다. 이런 생각은 특히 여성복 상의에서 강했다. 그래서 1974년 뉴욕의 여성복 업체를 방문하여 그곳에 있던 상품 라인 가운데 자사 매상의 5%분 만큼을 사입하여 갭 브랜드를 붙였다. 이렇게 하여 매년 5%씩 갭 브랜드의 비율을 높여가고 이것을 남성복과 아등복으로 확대하여 발전시킨 브랜드
Guess - 게스
상상하다, 추측하다라는 의미의 영어동사를 통해 신비스럽고 재미있는 이미지를 표현하여 젊은 타깃에 어필하는 브랜드
Intermezzo - 인터메조
音)극, 가극 따위의 막간연예를 뜻하는 단어로서 일(Work)과 일상사이의 즐거운 휴식을 의미하는 브랜드
Mine - 마인
나만의것을 의미하는 영어의 1인칭 소유대명사로서 나만의 개성과 스타일을 살리는 브랜드라는 의미
Nautica - 노티카
이태리어로 Navigation을 의미하며 액티브하고 다이나믹한 해양스포츠의 이미지를 담아 원색적인 칼라와 활동적인 아이템으로 브랜드이미지 표현
NIX - 닉스
게르만 민화의 물의 요정을 뜻하는 자연어
Polo - 폴로
Polo(말위에서 공치기하는 경기)를 의미하며 미국인들의 내면에 잠재해 있는 과거에로의 동경과 서부대초원에 대한 향수를 옷에 반영시킨 브랜드명
Resume - 레쥬메
요약, 개요라는 의미의 자연어로서 프랑스어에서 유래된 단어이다.군더더기없이 깔끔하고 간결한 디자인을 의미
Ssamzie - 쌈지
한글)담배, 부시 등을 담는 주머니라는 의미의 자연어로서 지갑, 가방류를 묶는 제품의 품목을 대표적으로 비유한 브랜드
System - 시스템
체계를 뜻하는 중성적인 단어로서 패션의 아이템구성의 체계가 돋보인다는 의미
Time - 타임
시간을 뜻하는 쉬운 영어자연어로서 포괄적인 의미를 내포하는 브랜드.유유히 흐르는 시간의 이미지를 통해 변화하는 트렌드를 담는다는 의미
Tomboy - 톰보이
말괄량이라는 의미의 영어자연어로서 보이쉬한 개성을 가진 여성의류컨셉을 표현
96NY - 나인씩스앤뉴욕
런칭년도와 활기가 넘치는 도시 NewYork의 이미지를 결합한 브랜드
a.b.f.z - 에이비에프지
'패션레고'라는 개념으로 등장한 브랜드로서 알파벳의 처음 a,b와 중간 f, 그리고 마지막자z를 통해 자유로운 코디네이션의 개념을 표현
Frion - 프라이언
Friday on의 합성어로서 금요일처럼 자유롭고 편한 옷이라는 컨셉을 직접적으로 표현한 브랜드
FUBU - 후부
For us By us의 약어표현으로서 폴로의 귀족주의에 대한 대안으로 흑인 사회의 정서 및 힙합문화를 최대한 반영한 브랜드
Invu - 아이엔비유
'I envy you'의 이니셜표현으로서 10대후반에 서 20대초반 타깃의 성향을 반영한 안
lollol - 롤롤
두명의 사람이 만세를 부르는 것처럼 보이는 시각적 효과 및 동음이 반복되면서 생기는 청각적인 재미를 노린 조어
mvio - 엠비오
music, Video, Audio를 뜻하는 음성적 이미지를 조합한 조어로서 젊은 세대의 문화적인 기호를 반영한 브랜드
NND - 엔엔디
Ninety Nine Degree라는 의미로서 가식이나 과장됨 없는 순수하고 세련된 표현으로, 볼륨을 가지지만 극도로 가벼운 디자인으로 자연과 인공적인 것, 과거와 미래의 상반된 요소들을 서로 융화시켜 베이직과 캐릭터의 자연스런 조화로 패션휴머니즘을 바탕에 깐 철학있는 패션문화를 제안한다는 가치를 표현
o'2nd - 오즈세컨드
Obzee의 후속브랜드로서 'Obzee's 2nd brand'라는 의미
o.z.o.c - 오조크
Own Zone Original Comfort라는 의미를 담는 이니셜브랜드
Obzee - 오브제
불어의 Objet(물건, 목표)를 변형한 브랜드 혹은 초현실주의 화법을 의미하는 단어로서 물체를 관념의 위치에서 떠나게 함으로써 실용적 관계로부터 심미적관계로 전환시켰고 이들의 오브제는 대부분이 조형적이기를 거부하고 하나의 전제되어진 대상, 논리의 싫증을 도입한 것이 아니라 지극히 우연적이고 충동적인 모습으로 선택되어진다. 이러한 개념을 담은 독특한 개성을 의미
VOV - 보브
Voice of noices라는 의미로서 최고의 소리, 최고의 표현을 의미하며 시각적으로 V의 반복을 통해 임팩트를 표현
yah - 야
You Are Here이라는 문장의 이니셜표현으로서 다른 어떤곳에 있는것이 아닌 지금 여기에 존재하는 젊음을 의미
YK038 - 와이케이공삼팔
창업자 영문 이니셜과 창업 당시 나이인 38을 기호처럼 결합한 브랜드
Zippyziggy - 지피지기
지피지기 백전백승'이라는 고사성어를 활용한 브랜드로서 동음반복을 통해 청각적, 시각적 임팩트효과를 노린 브랜드
zzb - 지지베
지지배(기집애의 귀여운 표현)을 이니셜로 표현한 브랜드로서 여성스러움과 귀여운 느낌을 적극 부각시킨 브랜드
Blazer - 블레이저
시보레 초대형승용차. '선전하는 사람, 운동선수용 상의'라는 뜻의 영어 표현
Carnival - 카니발
기아의 RV. 카톨릭 국가에서, 사순절 전 3일에서 1주일 동안에 걸쳐 거행되는 축제
Chairman - 체어맨
쌍용의 대형승용차. '회장, 의장, 위원장' 등 최고의 위치를 상징하며, 의미와 같이 최고급의 차임을 표현
Clio - 클리오
르노의 소형승용차. '그리스 신화의 Muses 中 역사의 여신'을 의미
Colt - 콜트
미쓰비시의 소형승용차, '망아지, 초심자'라는 뜻의 영어로 운전자의 첫 차로서의 이미지를 표현
Corolla - 코롤라
토요타의 소형승용차. '꽃받침'을 의미하는 영어
Eclipse - 이클립스
미쓰비시 스포츠카. (해·달의) 식(蝕)을 뜻하는 영어로 오픈되는 스포츠카의 외형적 특성을 상징적으로 표현
EF Sonata- 쏘나타
현대의 중형차. 주명곡(奏鳴曲)이라는 뜻으로 우아하고 세련된 이미지를 표현, EF는 Elegant Feeling의 약자
Equus - 에쿠스
현대의 대형고급승용차. '개선장군의 말, 멋진 마차'라는 의미의 라틴어로 Excellent, Quality, Unique, Universal, Supreme 영문이니셜 조합
Explorer - 익스플로러
포드의 SUV. '탐험가'의 뜻으로 생활의 자유를 추구하는 SUV의 이미지를 표현
Felicia - 펠리시아
스코다의 소형승용차. '여자이름'
Fiesta - 피에스타
포드의 소형승용차. (스페인, 라틴아메리카의 종교상의) 휴일, 축제라는 뜻으로 경쾌하고 즐거운 휴일과 함께 하는 차를 의미
Galloper - 갤로퍼
현대의 RV. '질주하는 말, 전령장교'를 의미하는 단어로 빠르게 질주하는 자동차의 이미지를 상징적으로 표현
Istana - 이스타나
쌍용의 MPV. '궁전'이라는 뜻의 말레이어로 '궁전같이 편안한 차'라는 의미
Jaguar Xi - 재규어
재규어의 고성능 스포스카. ' 남미산 표범'을 의미하며 고성능의 최고속도를 자랑하는 제품속성을 상징적으로 표현
KA - 카
포드의 경차. '(고대이집트인이 믿었던) 사후의 부활을 위한 영적 부분'을 의미하는 말로 Car의 발음과도 유사해 화제성
Laguna - 라구나
르노의 중형승용차. '작은 호수(Small Lake)'을 의미하는 스페인어로 자연지향적인 이미지를 표현
Mercedes EClass - 메르세데스 E클래스
메스세데스 벤츠의 중대형승용차. 다임러의 오스트리아 판매대리인이었던 에밀 옐리네크의 딸 '메르세데스'의 이름을 딴 것으로 E-Class, S-Class등으로 제품속성을 연계한 이니셜로 클래스를 시리즈화함.
Musso - 무쏘
쌍용의 SUV. '코뿔소'라는 의미의 순우리말 '무소'를 변형하여 '튼튼하고 강인함'을 나타내는 동시에 '순국산 모델'임을 강조하기 위하여 우리말을 사용
Neon - 네온
크라이슬러 준중형승용차. '네온'이라는 기체원소로 첨단적이고 세련된 이미지를 전달
New Beetle - 뉴비틀
폭스바겐의 소형승용차. '딱정벌레'라는 의미로 딱정벌레처럼 생긴 외관을 본따 만든 이름
Octavia - 옥타비아
소코다의 중형승용차. '여자이름'
Picasso - 피카소
씨트로엥 미니 MPV. '스페인태생의 화가인 피카소'로서 입체설계의 컨셉을 상징적으로 표현
Polo - 폴로
폭스바겐의 MPV. '4명이 한조가 되어 말을 타고 공을 치는 경기'
Prodigy - 프로디지
포드의 중형 패밀리 하이브리드카. '비범, 천재, 경이'라는 의미의 영문표현으로 제품의 우수성을 표현
PT Cruiser - 크루저
크라이슬러 소형승용차. 영어로 '순양함'을 의미하며 부드러운 핸들링과 편안한 승차감을 표현
Puma - 푸마
포드의 중소형승용차. '푸마(아프리가 라이온)'이라는 동물이름을 사용해 속도감과 날렵한 외관을 표현
Punto - 푼토
피아트의 MPV. 영어로는 '점(點)' 펜싱용어로 '찌르기'라는 의미로 날렵하고 샤프한 이미지를 표현
Rezzo - 레조
대우의 RV. '시원하고 상쾌한 바람이 부는 쉼터'라는 뜻의 이태리어
Rio - 리오
기아의 소형승용차. 스페인어로 '강'을 뜻하며 '활기차고 역동적이다'라는 이미지를 표현
Santa Fe - 산타페
현대의 인디언마을의 이름 (미국 뉴멕시코)으로서 '일상에서 벗어난다'는 휴식과 레저의 의미
Scenic - 씨닉
르노의 MPV. '경치가 아름다운'이라는 뜻의 영어로 레저용으로서의 자연지향적인 특성을 부각한 이름
Serena - 세레나
닛산의 MPV. '여자이름'을 사용하여 경쾌하고 부드러운 이미지 표현
Silver Ghost - 실버고스트
롤스로이스의 첫모델. '은빛유령'이란 의미로 차의 차체가 알루미늄으로 되어 은빛으로 빛나는 외형적 특성을 표현
Skyline - 스카이라인
닛산의 스포츠형 중형승용차. '지평선'을 뜻하는 영어로 넓은 대지로 질주하는 차의 이미지가 그려짐
Starex - 스타렉스
현대의 SUV. 'Star(별)'와 'Rex(왕)의 합성어로 '별의 황태자', '별중의 별'이라는 의미
Stratus - 스트라투스
크라이슬러의 중형차. '층운(層雲)'을 뜻하는 영어로 구름처럼 편안한 차를 의미
Taurus - 토러스
포드의 중형차. '황소자리'라는 뜻으로 튼튼하고 힘 좋은 차의 이미지를 상징적으로 표현
Terrcan - 테라칸
현대의 RV. 라틴어'Terra(땅)'과 'Khan(왕)'의 합성어로 '대지를 지배하는 차(사람)'을 의미
Tiburon - 티뷰론
현대의 스포츠카. '상어'를 뜻하는 스페인어로 역동적이고 날렵한 스타일을 의미
Tiburon - 티뷰론
현대의 스포츠카. 스페인어로 '상어'라는 의미를 가진 단어로 날렵한 모양의 차체를 표현
Viper - 바이퍼
크라이슬러 스포츠카. 영어로 '살무사, 독사'를 뜻하며 스포티하고 날렵한 자동차의 외형을 상징적으로 표현
Windstar - 윈드스타
포드의 밴. 'Wind'와 'Star'의 합성어로 '빠르고 자유로운 자동차'의 이미지를 표현.
Avella - 아벨라
기아의 소형승용차. 라틴어 'Avelo(갖고 싶은)'와 'Illa(그것)'의 합성어로 '갖고 싶은 차'를 의미
Trajet XG - 트라제 XG
현대의 RV. '여행'이라는 뜻의 프랑스어이며 XG는 (Extra Glory) '최고의 영광'을 의미
Visto - 비스토
기아의 경차. '경쾌하고 빠르다'라는 의미의 스페인어로 젊은층의 생동감을 표현
Bobbi Brown - 바비브라운
메이크업 아티스트인 바비브라운은 '가장 자기 자신처럼 보이되, 조금 더 아름답게 보일 수 있는 것이 진정한 메이크업' 이라는 생각으로 제품을 만든다. 많은 헐리웃의 유명스타들을 고객으로 확보하고있는 바비브라운은 색조 전문브랜드뿐 아니라 스킨케어와 향수라인까지 갖추고 토탈 코스메틱 브랜드로 발돋움 하고 있다
Chanel - 샤넬
패션디자이너로 유명한 코코 샤넬은 그 특유의 끼로 패션 제품에서 향수로 그리고 75년 뷰티 라인의 전 제품을 만들어 낸다. 어린시절 수녀원에서 자라면서 화이트와 블랙라는 칼라에 특별한 의미를 갖게된 그녀는 전제품의 칼라를 블랙 앤 화이트로 설정한다. 그녀에겐 가장 활동적이면서도 우아한 색상이라는 의미이다
Chen You - 첸유
인종차별이 극심했던 1930년대에 헐리우드에서부터 인정받은 메이크업아티스트로서 메이크업뿐 아니라 스킨케어 브랜드를 직접 만들어 피부를 개선하고 완벽하게 피부를 표현할 수 있는 자신만의 브랜드로 제시.
Estee Lauder - 에스떼로더
1946년 설립된 에스티 로더 그룹은 1953년 유스 듀(Youth Dew)라는 베스 오일용 향수를발매하여 미국 최고의 판매를 기록한 이후 계속적인 히트상품과 베스트 셀러를 기록하고있다.또한 에스테 로더 그룹 안에는 아라미스, 클리니크 등 6개의 계열사가 포함되어있다.
Guerlain - 겔랑
1828년 프랑스 파리에 처음으로 문을 연 겔랑은 화려한 금장으로 기억되는 고급제품이다. 프랑스에서도 한정된 고객층을 대상으로 하는 겔랑은 한 때 엄격한 멤버쉽으로 운영되는 겔랑 부띠크에서만 판매되었고, 겔랑을 사용한다는 것 자체가 상류층의 표시이기도 했다.훌륭한 것을 추구하는 훌륭한 사람들에게 최고의 제품을 선사하겠다는 철학을 가지고있다.
Helena Rubinstein - 헬레나루빈스타인
세계 최대의 코스메틱 기업인 프랑스 L'OREAL(로레알) 그룹의 최고 브랜드로 자리잡은 헬레나 루빈스타인은 세련되고 전문적인 제품을 원하는 여성들을 위한 최상의 제품들을 선보인다. 대담함, 아방가르드, 앞선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HR은 Force C 라인,Powder A,Future White 라인 등으로 끊임없이 제품개발을 하고있다
Ingrid Millet - 잉그리드밀레
아름다움의 본고장 프랑스의 대표적인 스킨케어 화장품의 이름이며 노화방지와 신선한 세포치료의 개척자인 미생물학자의 이름이기도 합니다. 그녀는 모든 생명의 근원인 바다에서 여자의 아름다움을 찾았다
Naomi Campbell - 나오미 켐벨
모델이자 배우로 유명한 아름다움의 상징, 흑진주 나오미 켐벨의 이름을 따서 화장품브랜드에 적용
Orlane - 오랑
17세기 앙리4세의 올레앙家의 이름에서 출발. 프랑스에서는 전통과 품격을 가장 소중히 생각하는 스킨케어의 오뜨 꾸뛰르로 불릴만큼 상류사회의 화장품으로 여겨지고있는 브랜드
Shu Uemura - 슈 우에무라
슈 우에무라는 일본에서 메이크업 아티스트로 출발하여 많은 헐리우드 영화 제작에 참여하였다. 자유롭고 파격적이고 모던한 매장, 투명한 용기 등을 통해 화제가 된 슈우에무라는 색조 화장품, 스킨 케어, 바디 케어, 브러쉬 등의 다양한 제품을 선보이고있다.
Sisley - 시슬리
1976년 프랑스 도르나르 백작부부에 의해 만들어진 제품으로서 '살아 있는 식물 세포는 인간의 세포 조직과 매우 유사하여 인간의 세포가 식물세포의 효과를 완벽히 소화해 낼 수 있다'는 믿음으로 식물성 쟤료로만 만드는 제품. 여기에서 시슬리는 프랑스의 인상파 화가인 시슬리를 의미하며 자연과 전원을 대상으로 한 작품활동을 한 것이 제품컨셉과 맞아 떨어져 브랜드 명으로 결정
Yves Saint Laurent - 이브생로랑
이브생로랑은 지구상에서 현재 유일하게 생존해있는 1세대 Haute Couture 디자이너로서 색채 본연의 선명함,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함, 눈부실 정도의 화려함을 추구한다.이브 생 로랑의 모든 화장품들은 매우 신뢰도 높은 프랑스의 제약 회사인 Sanofi Beaute에서 제조.
Amore - 아모레
이태리어로 사랑이라는 의미로서 사랑하고 사랑받는 여성의 이미지를 부드럽게 표현한 브랜드
Clinique - 클리니크
불어로 Clinic(진료소, 의학적인)이라는 의미로서 전문적이고 체계적인 피부관리시스템을 구사한다는 의미를 표현한 브랜드
De la mer - 들라메르
불어로 '바다로부터'라는 의미이며 해양요법을 통한 피부에 수분공급 등을 강조한 명칭
Eau de Blue - 오드블루
'푸른 물'이라는 의미의 불어로서 상괘하고 신선한 이미지를 푸른 칼라를 통해 표현한 브랜드
La Neige - 라네즈
불어로 '눈(Snow)'라는 의미로서 순수하고 하얗고 신선한 이미지를 표현한 구체물에 제품컨셉을 비유
La Prairie - 라프레리
불어로 목장, 풀밭, 초원이라는 의미의 자연어로서 자유롭고 평화로운 분위기를 나타내면서 자연지향적인 의미 내포
La teinte Ricci - 라뗑리찌
Nina Ricci 의 색조라인으로서 '니나리찌의 빛깔'이라는 의미를 담고있다
Lac Vert - 라끄베르
LacVert는 프랑스어로 호수(Lake)를 의미하는 '라끄(Lac)'와 초록색(Green)을 뜻하는 '베르(Vert)'의 합성어로 독특하고 품격있는 음성 이미지를 통해 '초록빛 호수처럼 깨끗하고 아름다운 피부를 위한 화장품' 임을 표현
Mamonde - 마몽드
불어로 '나의 세계'라는 의미로서 자유롭고 독립적인 여성의 이미지를 표현한 브랜드.문법적으로는 남성명사 Monde에 맞춰 Mon monde(몽몽드)로 써야 맞는 표현이나 어감을 따라 변형한 형태
Rosee - 로제
불어로 '이슬'이라는 의미를 담는 자연어로서 맑고 깨끗한 이미지를 비유적으로 표현
Ultima - 울티마
Ultima는 최후의 ,궁극적인, 최종적인이라는 의미의 라틴어로서
Verite - 베리떼
불어로 '진실'이라는 의미를 갖는 자연어로서 신뢰할 수 있는 브랜드라는 의미
A3F[on] - 에이쓰리에프온
3 Functions of Age care system의 의미로서 피부노화에 대한 체계적이고 과학적인 방법을 통한 기능을 높힌 제품이라는 의미
B&F - 비앤에프
Be & Forever의 의미로서 젊은 피부를 영원히 유지시켜준다는 의미
efu: - 에퓨
Especially for you의 이니셜을 그대로 표현한 브랜드로서 10대의 젊고 맑은 피부만을 위한 전문화장품이라는 의미
H2O+ - 에이치오플러스
물의 화학기호인 H2O를 그대로 활용하고 Plus를 뜻하는 기호와 결합하여 '충분한 수분공급 그리고 그 이상의 효과'라는 의미를 내포
ICS - 아이씨에스
Individual Care System의 약어로서 개개인의 피부타입에 맞는 전문케어시스템의 맞춤서비스를 의미
Iope - 아이오페
Iope는 Integrated effect Of Plant Extracts 라는 영문의 이니셜즉, 식물 추출물의 뛰어난 효과를 의미
IPKN - 입큰
IPKN은 ‘Independent Professional Korean Newyorker’의 약자로 독립적이고 프로페셔널한 뉴요커의 모습을 추구하는 세련되고 감각적인 여성을 위한 화장품이라는 의미
Iplip - 이플립
Intrinsic Plant energy Living In Professional body care의 머리글자를 딴 조어로서 풀잎같이 맑고 고운 바디피부의 이상을 현실화시킨다는 의미
Shiseido - 시셰이도
시세이도란 브랜드명은 중국의 고전 역경에서 출발. 至哉坤元 萬勿資生 乃順承天 (대지의 덕에 의해 모든 사물은 생성된다.)에서 유래한 이름. 만물의 생성 근원인 자연에서 새로운 가치를 창조, 개발하여 인간을 아름다움의 세계로 인도한다는 시세이도의 기업정신이 그대로 담긴 브랜드.
SK II - 에스케이투
Skin의 첫 두 알파벳과 숫자표현을 통해 '제2의 피부', '피부재생'이라는 컨셉을 표현.양조장에서 일하는 조주사들의 손이 쉽게 늙지 않는 것을 보고 인간의 피부조직과 똑같은 효모에서 추출한 발효대사액인 피테라를 통해 피부재생을 실현하고자 함.
ZD - 지디
Zero Defect라는 의미를 담은 이니셜로서 완벽한 피부미용을 추구한다는 의미
Aveda - 아베다
'삶의 지혜'를 의미하는 산스크리트어인 아유베다 이는 질병 및 건강의 비밀 뿐만 아니라 전 우주의 리듬과 구조를 포괄하는 의미
Bodyshop - 바디샵
머리에서 발끝까지 전신미용에 관한 모든것이 있는 샵이라는 의미
Entia - 엔시아
'본질, 정수, 실체'를 의미하는 라틴계의 영어로 생체 필수영양 성분 중 하나인 비타민 C를 피부에 전달함으로써 건강하고, 투명한 피부의 실현을 목표로 개발
Hera - 헤라
그리스신화에 등장하는 제우스 신의 정실부인이자 신들의 여왕. 결혼과 아이, 여성의 성생활을 수호하는 여신. (헤라라는 이름은 그리스어로 '보호자'를 뜻하는데, 그래서인지 헤라는 혼례날의 신부들과 아기를 분만하는 어머니들, 그리고 유모들의 보호자로 숭배)
Kesalan Patharan - 케사랑파사랑
케사랑 파사랑이란 식물의 뿌리(일설에서는 회비 나무라고 함)에서 발생하는 포자(胞子)로, 민들레의 면모(綿毛)같은 생물로 이른봄에 많이 보이며 바람을 타고 훨훨 하늘을 헤엄치고 살포시 날아와 옷 서랍이나 옷장 속 경대 안에 잠복해 있으며 화장품의 분가루를 먹고사는 작은 생물
Make up Forever - 메이크업포에버
색조화장 전문브랜드로서 오래가는 메이크업
Ohui - 오휘
한국전통 건축양식의 전문용어로서 단청을 둘러싼 5色무늬의 색을 의미하며 우아하고 기품있는 고품격이미지를 상징
Origins - 오리진스
Origin(원천, 기원)의 복수형태로서 '태생, 가문, 혈통'이라는 의미를 담는 자연어이며 원래 태어났을 때의 젊고 깨끗한 피부를 추구한다는 의미
Orthia - 오르시아
ORTHIA 는 '달의 요정' 이라는 뜻으로 달과 같이 밝고 환하며, 요정처럼 시간을 초월하는 영원한 아름다움을 갖고 싶어하는 여성의 소망을 표현하는 감성적인 이미지와 함께 Outline Reset and Trim for hours immortal Allurement 의 합성어로 얼굴의 선(Tightening),면(Brightening) 그리고 공간(anti-aging)을 뜻합니다
Remit - 레미트
'되돌리다'라는 의미로 노화되어가는 피부를 Youth Plus & Aging Minus Systm에 의 해 다시 젊고 건강한 피부로 회복시켜준다는 의미를 내포
SwissLine - 스위스라인
알프스의 순수함과 스위스의 과학이 만든 스킨케어브랜드로서 오염되지 않은 자연에서 추출한 순 식물성 원료와, 오랜 기간 피부만을 연구해온 기술을 브랜드에 적극 표현
Vatang - 바탕
바 탕 은 '사물을 이루는 토대'를 뜻하는 순수 우리말로서, 모든 메이크업의 근본인 피부색 표현의 중 요성을 나타낸 브랜드
Ylem - 일렘
物)일렘(우주창조이론으로 모든 원소의 기원이 된다는 물질
Biotherm - 비오뗌
'생명의'라는 의미의 Bio와 주된 재료가 되는 Thermal Plankton을 합성한 표현으로서 자연지향적, 생명공학적 이미지를 직접적으로 표현한 브랜드
Cellex-C - 셀렉스씨
Cell(피부세포)와 Excellece와 Vitamin C를 결합한 합성으로서 피부세포조직하나하나에 비타민을 공급한다는 의미
Clarins - 클라란스
Clarifing Institute의 합성어로서 피부를 맑고 투명하게 만드는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방법을 추구한다는 의미
Elesis - 엘레시스
ELESIS는 Elite System의 약자로 도시 속 각종 환경 오염으로부터 피부를 아름답게 가꾸어 주는 가장 탁월한 시스템 화장품을 의미
Gienic - 지에닉
Gienic 이란 사전적 의미로는 '건강의' '위생에 좋은' 이라는 뜻을 담고있는' Hygienic' 의 의미. Gienic 의 기본적인 의미는 가장 건강과 위생에 민감한 청소년들의 몸과 마음의 건강과 위생을 위한 제품이라는 뜻
Idem - 이뎀
Intensive Derma Skin-care System의 약자로 집중 피부 케어 시스템을 말하며 생명력 넘치는 자연 에너지를 피부에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새로운 스킨케어 체계를 의미
Innisfree - 이니스프리
<人, In> is free라는 문장을 합성한 표현으로서 인간을 자유롭게 피부속을 자유롭게한다는 컨셉을 담은 브랜드
Ossion - 오씨언
Ossion(오션)은 Ocean과 Passion의 합성어로 바다의 열정을 담은 생명력 넘치는 해양화장품을 의미
Pamess - 파메스
Perfect Activity(완벽한 진단)와 Maximum Process(빠른 효과)의 합성어로 피부활력을 위한 활성기법 이라는 의미의 피부과학적 화장품을 의미
Perskin - 퍼스킨
Personal Skincare의 약자로서, 피부 젊음을 최대한 오래 유지시켜줄 수 있도록 피부 세포 하나하나마다 필요한 수분과 영양을 공급한 개개인을 위한 피부 맞춤 화장품이라는 의미
ROC - 록
프랑스약사가 개발한 제품으로서 처음 제품을 판매했던 피부진료원이름인 'Roger Cavailles'에서 출발한 이름
Apple Computer - 애플컴퓨터
사과'를 뜻하는 영어로 혁신적이고 젊은 이미지를 표현
Arrow Electronics - 애로우 일렉트로닉스
'Arrow(화살)'에서 유래된 이름으로 기업비전과 제품의 기능성을 상징적으로 표현
Bull - 불
'황소'라는 뜻의 영어로 진취적인 이미지를 상징적으로 표현
Canon - 캐논
그리스어로 '재는 막대'에서 유래, 영어로 '카논(기독교적 신앙 및 행위의 기준), 규범'이라는 의미
Cap Gemini - 캡 제미니
Cap(모자, 최고)와 Gemini(천체의 쌍둥이 자리)의 합성어
Cirrus Logic - 시러스 로직스
덩굴, 구름의 층운'을 뜻하는 영어
Delphi Group - 델파이 그룹
Apollo의 신전이 있던 옛 그리스의 도시명에서 유래
Fore Systems - 포 시스템즈
앞부분의, 선방의 라는 뜻의 영어로 시스템의 선도적 기업을 의미
Gateway - 게이트웨이
'대문, 출입구'라는 의미로 통신전문기업으로서의 이미지 표현
Honeywell - 하니웰
'Honey(벌꿀, 훌륭한 것)'와 'Well(훌륭히, 잘)'의 합성어로 기업의 우수성 표현
Lucent Technologies - 루슨트 테크놀로지스
Lucent는 '빛을 내는, 투명한'이라는 뜻의 영어로 '빛을 발하는 기술'을 의미
Newbridge Networks - 뉴브릿지 네트웍스
새로운 것(기술, 미지의 것)으로 연결해주는 통신제품의 속성 표현
Novell - 누벨
프랑스어로 '새로운 것'을 의미하며 혁신적인 이미지를 표현
Oracle - 오라클
'신탁, 예언자'라는 뜻의 영어
People Soft - 피플 소프트
대중적인 제품속성과 기업지향이미지를 표현
Pioneer Electronic - 파이오니어 일렉트릭
개척자, 선도자라는 뜻의 영어로 진취적인 기업이미지를 전달
Platinum Technology - 플래티넘 테크놀로지
최고의 기술력을 표현
Quantum - 콴텀
'양, 양자(물리용어)'을 뜻하는 영어로 첨단적이고 정밀한기술력을 표현